지산6리 장곡․한지란 - 물이 좋은 국사봉 아래의 마을
- 작성일
- 2016.07.21 16:26
- 등록자
- 정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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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곡과 한지란 마을은 원래 곽단에 속했던 마을이다. 그런데 인구가 불어나면서 5년 전에 곽단 마을에서 분리되어 지산 6리가 되었다. 역사적으로 보면 호구총수에는 마을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1912년의 지방행정구역명칭 일람에는 삼향면 장곡동으로 나오며 1917년 조선면리동일람에는 삼향면 지산리 장곡동으로 나온다. 1987년의 행정구역일람에는 삼향읍 지산리 3구 곽단 장곡으로 나온다.
長谷은 긴 계곡으로 이루어졌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실지로 국사봉 아래 촛대봉이 있고 그 줄기 사이 긴 계곡에 자리 잡은 마을이다. 살펴보면 무안에서 가장 오지의 마을이 아닌가 여겨진다. 또 다른 마을 한지란은 한길안에서 음운의 변화를 일으켜 지명이 된 경우이다. 즉 마을 앞으로는 구 국도 1호선인 수련길이 지나고 있다. 예전에는 광주 목포간 중심도로가 마을 앞을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해서 마을 이름도 큰 길 안에 자리 잡은 마을이란 의미의 ‘한길안’이었는데 자주 발음하다 보니 ‘한지란’이 되었던 것이다.
이 마을에는 나주나씨 무안박씨 평강채씨 등이 살고 있다. 자료를 보면 지금으로부터 400여년 전에 무관인 나주나씨와 무안박씨 양성이씨 등 세 장수가 난을 피해 살 곳을 찾아다니다 양성이씨는 곽단에 정착하고 나씨와 박씨는 장곡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이 마을은 일제강점기 때 무안에서 유일하게 목화 타는 공장(조면공장)이 있었다. 목화는 일본인들이 탐내는 작물로 식민지 시절 주민들에게 재배를 권장하는 품목이었다. 당시 이 마을 주민 중 한사람이 일본에 가서 목화 기술을 배워 공장을 세운 것이다. 그것은 운송로도 좋고 깊숙한 마을에 자리 잡고 있어서 여러모로 편리했기 때문이 아닌가 여겨진다.
계곡이 길고 물이 맑은 이 마을은 물에 관련된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마을 위쪽 촛대봉 기슭에서 흘러내리는 물은 약효가 뛰어나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피부병이나 관절염에 특효가 있다고 알려지면서 몽탄이나 일로 그리고 목포에서까지 사람들이 찾아왔다.
당시 마을에는 김씨와 박씨가 살고 있었는데 다른 마을 사람들이 물을 맞으러 마을에 들어오는 것을 김씨들은 굉장히 싫어했다. 뿐만 아니라 물이 영험하다고 했는데 영험하면 얼마나 영험하랴 싶어 의심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김씨 중 한사람이 일부러 개를 잡아다 그 계곡물에서 씻었다. 왜냐하면 정말 名山에 藥水라면 개에게 부정을 타서 물길이 끊길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정말로 물길이 끊어져 버린 것이다. 그렇게 사시사철 흐르던 물이 딱 막혀 버린 것이다. 이 사실을 안 주민들은 김씨들을 마을에서 쫓아냈으며 마을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그런 전통이 지금까지 이어져 이 마을에는 김씨가 한 가구도 살지 않는다.
마을이 깊어서 삼향읍에서는 유일하게 군내버스가 들어오지 않는다. 해서 군에서 주민복지 차원에서 실시하는 ‘행복택시’가 하루에 세 번 왕복 운행된다. 마을이 깊지만은 행복한 마을이다. 주민들의 교육열이 높으며 목소리가 마을 밖을 벗어난 적이 없으며 장애자가 없다. 주민들이 서로 단합하고 양보하여 살기 좋은 마을을 가꾸고 있는 것이다.
변란기에도 피해가 없는 마을
마을이 큰 길 가에 있어도 한국전쟁 등 변란기에는 피해가 없었다. 하지만 한때 골짜기마다 시체가 널브러져 있던 때가 있었다. 목포형무소 탈출사건 때문이다. 이 사건은 1949년 9월 14일 목포 형무소서 수감자 350여명이 감옥을 파괴하고 일로 방면으로 탈출한 사건이다. 이때 수습 과정에서 대부분이 사살되었는데 이 마을 주변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은 것이다.
마을 앞으로 일로장을 보러 가는 지름길이 있다. 주로 마을 사람들을 포함하여 복룡 월호 청계리 사람들이 이용하는 길인데 의미있는 지명이 있다. 마을을 거쳐 국사봉 기슭인 독점재를 지나서 선바위골을 지나 감돈마을에 들어선다. 그런데 선바위골에는 커다란 선바위가 우뚝 서있다. 마치 선돌 마을의 입석과 같은 형상이라고 한다.
주민들 사이에는 국사봉에 호랑이가 있었다고 한다. 장곡 사람이 일 보러 국사봉을 넘어가는 일이 있었는데 그때 호랑이가 휙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는 것이다. 사실 확인을 할 수는 없지만 몽탄에서도 호랑이를 봤다는 구전이 있는 것을 보면 무안에도 호랑이가 있지 않았는가 여겨진다.
산이 깊어서 농지가 적다. 그럼에도 주민들이 경제적인 여유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숲에서 생산되는 각종 임산물 때문이다. 또한 반듯한 목재가 많이 생산되어서 주민들이 팔아 가용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한지란 마을은 시용산을 주산으로 하고 있다. 마을에는 돼지를 기르는 청아농장과 간장 된장 등을 생산하는 삼학식품이 자리하고 있다. 장곡마을에도 개 오리 닭 등을 기르는 농장들이 있다.
남아있는 지명으로는 장곡마을의 오장골 큰고랑 뒷고랑 거정골 머골 보양개 독점재 홍골 수랑골 솔영개 말무덤 등이 있다. 거정골에는 유달공원묘지가 들어서 있다. 한지란 마을에는 후리골 방구등 부채골 등의 지명이 남아있다.
* 출처 : 무안문화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