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포3리 맥포․백학 마을 - 솔대거리가 있는 함평이씨 동족 마을
- 작성일
- 2016.07.21 15:32
- 등록자
- 정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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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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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향조의 호가 지명이 되어
맥포는 맥포3리에 속하는 마을로 맥포와 백학으로 이루어졌다. 맥포 마을은 함평이씨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지만 백학동은 손씨들이 많이 살고 있다. 마을은 승달산의 맥을 이은 국사봉이 대봉산을 지나 영산강을 향해 힘차게 뻗으면서 만들어낸 삼학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삼학산은 백학 홍학 금학을 말하며 옥녀봉이라 부르기도 한다. 마을 앞에는 남창천이 흐르고 있으며 장항포 간척으로 형성된 넓은 농지가 있다.
지금도 마을 뒷산에 김해 김씨 문중의 산이 있는 것처럼 원래 이 마을은 김해김씨의 터였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 김씨들은 한 가구도 살지 않고 함평이씨 집성촌이 되었다. 함평이씨 입향조는 李先馥(자-여형, 호-맥호. 1588 - 1645)으로 예빈서 직장을 역임하였으며 나주 다시에서 세거하였다. 공은 孝와 忠으로써 심신을 가다듬었는데 광해군 대에 시국이 어지럽자 공명을 멀리하고 자연을 벗 삼아 지낼 것을 다짐한 후 1618년을 전후하여 세거지를 떠나 이 마을로 들어왔다. 기록에 따르면 삼학산 아래에 정자를 짓고 후진을 양성하면서 마을 앞 바다를 막아 새언안을 축조하고 간척지를 조성하여 농지를 만들었다. 이후 이 마을은 무안의 名家가 되었다.
지명도 입향조의 호인 맥호를 따서 지었는데 이후 포구가 활성화 되자 현재의 이름인 맥포라 이름하였다. 포구는 현재 각두(뿔머리)라 부르는 지역에 있었으며 일제강점기 때 호남선 철도가 들어서면서 그 기능을 상실하였다. 불머리는 소가 엎드려 있는 형국으로 장항포 들 너머에 있는 죽산리의 범바위를 주시하고 있다.
문헌으로 살펴 본 지명의 변천을 보면 1789년의 호구총수에 나주목 삼향면에 맥포로 나온다. 1912년에 무안군 삼향면 맥포동, 1917년에도 삼향면 맥포리 맥포동으로 나온다.
마을은 소쿠리형으로 와우형국이다. 마을 앞으로 서해안 고속도로와 호남선이 지나고 있어 답답한 느낌을 주기도 하나 마을 앞의 탁 트인 부분을 가려주는 역할도 하고 있다. 마을 옆은 방아다리 형국이다. 지명도 방아다리와 확[舂]이 있고 치(의 전라도 사투리로 곡식 따위를 고르는 기구. 주로 고리버들이나 대나무로 엮어 만든다. 어린 아이가 요에 오줌을 싸면 머리에 키를 씌우고 소금을 얻도록 하기도 하였음)를 나타내는 大箕洞 小箕洞도 지명이 있다.
솔대거리가 있는 마을
마을에 솔대거리가 있다. 마을 왼쪽 백학마을로 가는 중간에 송정등이 있는데 그 아래에 솔대거리가 있었던 것이다. 솔대거리란 마을에서 과거급제자가 나왔음을 기념하여 마을의 특정지역을 선정하여 솔대를 세워 기념하는 거리를 말한다. 특히 이 마을의 솔대거리는 한양 가는 길목에 있다.
마을에 서당이 있고 옆 마을인 백학에는 간이학교가 들어설 정도로 주민들이 교육에 관심이 많았다. 또한 일제강점기에 마을의 학생들이 매일 아침 목포로 통학하기 위해서 일로역으로 줄지어 가는 행렬은 장관이어서 주변 마을의 부러움을 샀다. 해서 이 마을은 다른 마을에 비해 교사 세무사 등 공직에 진출한 인물이 많이 배출되었다.
마을회관 옆에 효자각이 있는데 이춘서와 이돈성의 父子효자각이다. 아버지 효자각은 사각 돌기둥에 목조 팔작지붕을 얹었다. 안에는 효자비와 현판이 하나 걸려 있다. 아들 효자각은 석조로 만들어졌다. 아버지 이춘서(자-인여, 호-균헌. 1836 - 1895)는 어려서부터 효행이 지극하였으나 일찍 부친을 여의고 홀어머니를 정성껏 모셨다. 엄동설한에도 물고기와 산약을 준비해 봉양하는 등 어머니의 뜻을 한 번도 거역하지 않았다. 갑작스러이 모친이 돌아가시자 식음을 전폐하고 슬퍼했으며 3년 동안의 시묘살이를 해 주변을 감동시켰다. 1930년에 지은 아버지 효자각 옆에 아들인 이돈성(자-경칠, 호-경헌. 1867-1943)의 효자각도 있다. 후손들이 1936년에 건립하였다.
불머리의 나주나씨 세장산에서 남악신도시 건설용으로 흙을 파내는 작업을 하는 중에 청동기 시대 유적을 발견하였다. 2004년 호남문화원이 발굴한 이 유적은 고인돌 9기와 삼국시대 집터 그리고 토광묘 3기가 발굴되었다. 지석묘 9기는 옆으로 옮겨 보존되어 있으나 현재는 잡목 속에 방치되어 있다. 지석묘는 소쟁이등이라 불렀던 송정등에도 4기가 있었으나 지금은 1기만 남아있다.
한국전쟁 때 이 마을은 10여명이 피해를 입었다. 당시 삼향 분주소장 등 마을에 좌익성향의 지식인들이 많이 있어서 주민들의 피해가 많았던 것이다. 마을 뒤에는 당시 몸을 숨겼던 굴도 남아있다.
마을에서 농악이 성했었다. 정월이 되면 마을 뒷동산에서 아이들의 연날리기와 부녀자들의 강강수월래가 성행했으며 농악놀이를 비롯한 길거리제 샘제 등 당산제도 풍성했었다. 학문을 좋아하고 예절을 숭상하는 마을답게 학문과 관련된 ‘이선비와 여구’라는 전설도 채록하였다. 마을 주변은 농공단지로 지정이 되어 있으나 농지가격이 올라 멈칫거리고 있으며 마을에는 행복마을 조성이 한창이다.
마을 뒤 대봉산 능선에 몇 개의 포대 진지가 있다. 일제말기 일본군들이 만들었던 진지인데 만약의 경우에 미군들의 내륙진출을 저지하고 목포의 유류탱크들을 지키기 위한 대공포 진지로 추정된다. 지금은 형태만 남아있다.
주민들의 단결심이 강하다. 이 마을은 어른들을 중심으로 협동과 화합을 이루어 화목한 마을을 조성하고 있다. 또한 주민들의 목소리가 마을 밖으로 나간 적이 없다고 한다.
남아있는 지명으로 불머리 뒤의 점등과 방애다리 통샘 치골이 있었으며 남창천 안쪽을 팽상계라 부르기도 하였다. 또한 마을 앞 하천 옆의 논을 논테라 하였으며 개답 새언안 송정등의 당산거리 등이 있었다. 백학마을은 고래골(고로골)이라 하기도 하였으며 마을 앞에 290센티미터의 당산나무가 있다.
* 출처 : 무안문화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