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포2리 월계 마을 - 마을 앞으로 시내가 있었던 반달 모양의 마을
- 작성일
- 2016.07.21 15:26
- 등록자
- 정OO
- 조회수
- 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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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앞으로 시내가 있었던 반달모양의 마을
원래 월계는 맥포2리에 속한 마을로 극배 마을과 한 마을이었다. 맥포리의 극배와 월계 마을 그리고 용포리의 이동 마을은 경주이씨 집성촌이다. 1700년대 초에 이응신(자-자실, 1684 - ?. 현감을 역임했다) 이응명(자-군혁) 형제가 나주 영산포에서 뱃길을 따라 내려오다 맥포리 주변 산세의 수려함을 보고 정착한 마을이다.
처음엔 송산마을 입구에 있는 묵방동이란 곳에 정착하였다가 형인 이응신은 용포리 이동 마을로 가고 동생인 이응명은 극배 마을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해서 월계마을의 입향조도 극배 마을과 같이 이응명이다. 이 마을은 장항포 들의 경작을 위하여 극배 마을에서 옮겨 와 살면서 이뤄진 마을이다. 이후 다른 성씨들도 간척지 경작과 철로공사에 참여하면서 큰 마을이 형성된 것이다.
연도로 보면 1870 - 80년대에 경주이씨들에 의해서 마을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자료에도 1789년의 호구총수나 1912년의 자료에는 나오지 않고 1917년의 자료에 비로소 마을 이름이 나온다. 또한 얼마 전까지 이 마을을 포함하여 용포 계두 극배 등이 동계를 함께 지내기도 하였다.
처음엔 이 마을을 원산미(遠山美. 파랗게 그린 먼 산 같은 눈썹이라는 뜻으로, 美人의 눈썹을 形容해 이르는 말) 또는 원산매(원山梅, 또는 월산매)라 불렀다. 원산미는 마을 앞 들인 장항포와 관련되는 지명으로 추정되고 원산메는 마을 옆에 맥을 형성하고 있는 강당산의 형국에서 비롯된 지명이다. 즉 이 산은 게[蟹] 형국의 산인데 이곳에 매화나무가 있어 게 형국의 매화나무가 있는 곳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후 월계라는 지명으로 정착하는데 이는 마을의 모습과 위치에서 비롯된다. 마을이 국사봉의 줄기인 관음산에서 영산강을 향해 뻗어 나온 산등성이를 개간하여 이루어졌다. 해서 앞에서 마을을 보면 마치 반달처럼 둥그스럽게 자리잡은 모습이다. 또한 마을 앞으로는 1900년대 초 장항포 농지에 물을 대기 위해서 축조한 일로 감돈저수지의 물이 흘러가는 커다란 수로가 있었다. 주민들은 이 수로에서 목욕도 하고 빨래도 했는데 이러한 지형적인 모습을 보고 달 月에 시내 溪를 써서 月溪라 하였다. 하지만 주변 마을인 용계와 계두 마을에서는 원래 마을 이름에 닭 鷄를 썼다고 하는 것은 참고할 일이다.
일찍 전깃불이 들어 와
마을 뒤로는 811번 지방도로가 지나고 있으며 앞으로는 널따란 장항포 간척지가 펼쳐져 있다. 또한 마을 왼쪽으로는 경주이씨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강당산이 자리하고 있다. 마을 앞으로는 예전에 호남선 철로가 지나갔으나 현재는 그 철로 부지에 목포에서 일로로 가는 4차선 도로가 지나고 있다.
주민들은 1950년대 중반에 전깃불이 들어온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당시에는 호롱불이 대세였기 때문에 전깃불이 들어온다는 것은 대단한 변화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삼향읍에서는 제일 먼저 들어왔으며 다른 마을에서는 20여년 뒤에나 전깃불의 혜택을 봤기 때문에 상대적인 자부심이 대단하였던 것이다. 이런 요인으로는 당시 마을에서 방앗간을 운영하던 이암석(후에 도의원이 됨)씨가 自費를 들여 일로역에서 전기를 들여왔기 때문이다.
남아있는 지명으로 강당산 앞에 계선주 역할을 했던 바우백이가 있고 쑥대골, 강당 고매울, 또 삼향동초의 터를 일컫는 보천, 백토가루가 나왔던 회판디, 백다골 등이 있다. 마을에는 원샘이라 부르는 샘이 있었으나 현재는 메워져 있다. 마을의 역사가 짧아 내려오는 전통이나 문화는 별로 없으나 얼마 전까지 매년 정월 보름에 일로 사람들과 농사의 한 해 풍흉을 점치며 돌싸움을 많이 벌이기도 하였다.
간척지 주변에 사는 주민들이 그러하듯이 이 마을에서도 간척지 형성 때 소금물을 빼기 위해서 농지에 묻어 두었던 앙교대(암거죽, 일명 쑤기라고도 함)를 해방이 되자 다투어 파 내어 집을 짓는데 많이 사용하기도 하였다.
마을 입구에는 1948년에 세워진 삼향동초등학교가 있다. 일제 강점기 때인 1939년 용포에서 세워진 2년제 용포간이학교를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학교 터는 일본인들의 집이었다고 한다. 2006년에는 이 학교 아이들과 주민들이 단편 영화를 만들어 전국적인 관심사가 된 적이 있었다.
* 출처 : 무안문화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