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포1리 극배 마을 - 꼬막다불이 있는 끝배의 마을
- 작성일
- 2016.07.21 15:22
- 등록자
- 정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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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배의 음차 克培
극배는 맥포1리에 속하는 마을로 땅머리 고래실 신촌 극배로 이루어졌다. ‘끝배’라는 원래 지명의 음을 빌어 별 다른 뜻이 없이 한자로 표기한 지명이다. 예전에는 바닷물이 마을 앞 끝까지 들어와 배를 정착시킨 곳이라 하여 끝배라 불린 것이다. 그후 경주 이씨가 정착하면서 마을 이름을 고쳐 지금의 克培로 부르게 되었다. 1789년의 호구총수에도 나주목 삼향면 克培村, 1912년의 자료에는 무안군 삼향면 克培동으로 1917년의 자료에는 무안군 삼향면 맥포리 극배동으로 나온다.
원래 이 마을은 손씨 터였다. 그러나 오래 전 마을에 전염병이 돌아 주민들이 몰살을 당한 후에 손씨들이 물러가고 경주 이씨들이 들어왔다. 경주 이씨의 입향조는 1700년대 초 나주 영산포에서 뱃길을 따라 내려오다 이곳 산세의 수려함을 보고 정착한 이응신이다(자-자실, 1684 - ?. 현감을 역임했다. 월계 마을의 입향조는 이응신의 형제인 이응명이다). 현재 손씨는 세 가구가 남아있다.
마을의 지형을 보면 오목한 조리 형국으로 좁은 느낌을 준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예전에는 부촌이었고 행세깨나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주변 마을주민들이 가까이 하기를 꺼려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적은 농지에 특별한 소득원이 없어 매우 가난한 마을에 해당된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극포는 해군기지가 있었던 곳이다. 즉 ‘고려 말 공양왕 3년(1391년)에 극포영이 설치되었고 무안 현령이 성산극포권농방어사를 겸임하였다’는 기록이 있지만 정확한 위치와 실존 여부는 확인 할 수 없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군산 부곡, 극포 부곡, 임성 부곡 세 부곡을 합하여 무안군 삼향리가 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군산부곡은 현재의 군산동(원동)이며 극포는 극배, 임성은 임성 마을을 가리킨다.
마을 앞으로는 811번 지방도로가 나 있고 뒤로는 호남선 고속철도가 지나고 있다. 또한 마을 앞 장항포 들에는 남해안 고속도로와 서해안 고속도로를 연결하는 4차선 도로가 지나고 있다. 마을이 소쿠리 형으로 주민들의 주장처럼 소형국의 와우형으로 보인다. 실지로 광복 이후 한 때 마을 이름이 牛乳洞으로 불린 적도 있었다. 마을이 갯가에 위치하고 있어서 마을 곳곳에 지하수를 파더라도 대부분이 짠물이 나오는데 주민들이 소 젖에 해당된다고 믿는 지점에서 판 물은 식수로 시용하며 아무리 가물러도 마르지 않고 항상 넘쳤다고 한다. 1968년 대 한해 때는 주변 마을에서도 이 샘의 물을 길러다 먹었다고 한다.
꼬막다불이 있어
샘물이 있는 곳을 우유동이라 하고 쇠뚝(소를 매는 말뚝 줄)과 쇠말뚝(삼향동초교 앞에 있었던 동산을 말함)의 지명이 있다. 옆으로는 관음산(관림산 가임산이라고도 함)이 버티고 있으며 뒤로는 승달산의 한 지맥인 뒷동산이 자리하고 있다.
오래 전에 마을 앞 811번 지방도로 바로 아래 지점인 삼향동초등학교 입구에서 어떤 시설로 볼 수 있는 말목 등이 수십 개 발견된 적이 있었다.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지난 날 가뭄이 심할 때 관정을 설치하기 위해서 이곳을 팠는데 그때 뻘밭에서 아름드리의 말목들을 수십 개 발견한 것이다. 이는 갯고랑과 선창 관련 시설물로 추정되며 지금도 주변의 땅을 파면 나온다고 한다.
이 마을에는 오래 전부터 동계를 치러왔다. 이 마을의 동계가 역사성이 있어서 월계 용포 계두 등 주변 마을이 이 마을 동계에 가입하여 각종 행사를 치뤘다. 동계책도 오래 전부터 전해져 왔으나 얼마 전에 관리 소홀로 없어지고 요즈음엔 새로 만들어 관리하고 있다.
예전에는 당산제를 지냈다. 현재 에덴교회가 있는 곳에 유선각과 은행나무가 자라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제를 지냈다. 당시에는 상쇠가 꽹과리를 잘치고 농악패들을 잘 이끌어 목포등지에서 행사가 있을 때 원정가기도 했다. 현재는 교회가 들어서고 젊은이들이 없어 당산제도 없어지고 농악패도 없다. 하지만 샘제는 일부 주민들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마을에는 1948년에 세워진 삼향동초등학교가 있다. 일제 강점기 때인 1939년에 용포에서 세워진 2년제 용포간이학교를 옮긴 것이다. 학교 터는 일본인들의 집이었다고 한다. 2006년에는 이 학교 아이들과 주민들이 단편 영화를 만들어 전국적인 관심사가 된 적이 있었다.
마을 뒤 언덕에 꼬막다불이라는 곳이 있다. 일종의 조개무덤으로 꼬막이나 조개 껍질들이 많이 있는 곳이다. 예전에 이 마을에 살았던 사람들이 꼬막 등 어패류를 먹고 버린 것이 모여서 이뤄진 지명으로 보인다. 지금도 자세히 살펴보면 조개 등을 발견할 수 있다. 꼬막다불 위에 비자나무집이라는 곳이 있다. 그곳에 올라서면 마을만 아니라 장항포들 그리고 오룡산 일로 등이 훤히 보인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이곳에 오래된 비자나무가 있었으며 집이 있었다고 한다. 추정컨대 극포영이 있었다면 주변을 살필 수 있는 이곳에 있지 않았을까 여겨진다.
개장터란 지명이 있다. 초분이 있었던 곳을 말하며 마을에서 일로 송태의 삼향장으로 갈 때 넘나들었던 고개를 말한다. 주민들은 한낮에도 지나다니기가 무서울 정도로 기피했던 곳이라고 한다. 또한 이동마을에서 넘어오는 고개를 영구재라 하며 마을 왼쪽 일로 방향으론 새징게 모퉁이라는 지명이 있다. 그 외에 뒷재 진등(학교앞) 산정 맛파지 웃골 등의 지명이 남아있다.
* 출처 : 무안문화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