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1리 병곡마을 - 소나무들이 병풍처럼 둘러있었던 마을
- 작성일
- 2016.07.18 19:03
- 등록자
- 관OO
- 조회수
-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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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곡은 신학1리에 해당하는 마을로 창포만 주변의 5머리 중 ‘갈머리’에 해당하는 곳이다. 즉 학이 마른 목을 축이는 형국을 하고 있는 곳이다. 屛谷이란 마을 이름의 유래는 마을 뒤에 있었다는 숲에서 비롯된다. 지금은 개간을 하여 대부분 밭이 되었지만 1960년대까지만 해도 철룽이라 부르는 둔덕을 중심으로 소나무들이 병풍처럼 마을을 둘러 서 있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주민들은 무안읍의 주산인 병산의 맥이 마을 뒤까지 이어져 마을을 빙 둘러 아름드리 해송들이 병풍처럼 늘어서 있어서 아늑한 느낌을 주었다고 한다. 특히 마을 오른쪽에 소나무가 울창하게 심어진 갱변(또는 강변)이라는 둔덕을 두어 건해풍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였다.
지명의 변화도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무안군 현화면 屛風里로, 1912년 지방행정명칭일람에는 현화면 병곡동으로, 1917년 조선면리동일람에는 현경면 양학리 병곡동으로 나온다. 1991년에 무안읍 신학리 병곡으로 나온다.
이 마을은 상산김씨, 현풍곽씨(또는 포산곽씨라고도 함), 밀양박씨 등 세 성씨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세 성씨는 독특한 관계를 유지하며 한 마을에 거주하였다. 예를 들면 곽씨 가문에 대를 이을 아들이 없으면 박씨 가문에서 양자를 들이는 등 친근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이곳에 터를 잡은 입향조는 현풍곽씨로 처음엔 병산 기슭인 현재의 광산김씨 세장산이 있는 곳에 터를 잡으려 하였으나 여의치 않아 마을 앞 서당너머라는 곳에 먼저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창포만의 갯가에 위치하고 있어 좋지 않은데다 귀신(주민들의 의견)과 호랑이의 피해가 잦아 현재의 위치에 터를 잡았다.
郭命生(현종 을유 1669년 생 - 영조 갑자 1744년 졸. 자 - 直夫, 호 - 直菴)은 무안군에 최초로 들어온 현풍곽씨이다. 그는 강진 성전에 살다가 이곳 양학리로 들어와 살면서 名利를 버리고 자연과 벗 삼아 유유자적하였다. 또한 평소에 주자의 말씀 중 ‘聖人은 만사를 응하고 천지는 만물을 생할 때에 直할 따름이다’라는 말을 즐겨 사용했다고 한다. 아들은 돈목, 정목, 경목을 두었는데 돈목(숙종 신미 1691년 生 - 영조 을해 1755년 卒)은 무안읍 대곡리에서 살다가 현경면 현화리 성자동으로 갔고 정목(숙종 갑술 1694년 生 - 영조 을미 1775년 卒)은 이 마을에서 살았다. 후손들이 모두 책을 벗 삼아 생활하며 보냈다고 한다.
밀양박씨는 박종의(자-희인, 호-둔제. 현종대 사람)가 입향조로 당시 횡행하던 당쟁의 화를 피하기 위해 이 마을로 들어왔다. 박씨 입향조에 대한 기록은 박씨 제각인 경사재 앞에 있는 ‘경사재창건기념비’에 자세히 나와 있다. 상산 김씨의 입향조는 김상후의 아들인 김용달(1803-1886. 자-문경)이다. 김용달은 김상후가 장성군 동화면에서 살다가 청계면 상마리로 이사 와 병곡 마을 출신인 현풍 곽씨와 결혼하여 낳은 아들이다.
마을은 학이 목말라 하는 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큰 동네와 새터로 나뉜다. 이 마을에는 디딜방아가 없다. 왜냐하면 못살아서가 아니라 원래 ‘-머리’라 부르는 곳에는 디딜방아를 놓지 못한다는 풍습 때문에 그런 것이라 한다.
50명이 넘는 교사를 배출
이 마을의 풍수적인 지형은 배 형국이라 지하수를 파면 마을이 피해를 입는다는 옛 사람들의 말씀이 있었다. 실지로 마을 앞 큰길 옆에 있는 샘에서 물을 길러다 먹을 때는 마을에 좋은 일들이 많이 일어났다. 세 성씨 집안에서 50여명이 넘는 교사가 나올 정도로 가르치고 배우고자 하는 열풍이 있었으며 서로 돕고 단합하며 살았다. 그러나 주민들이 식수 사용을 위해 마을 곳곳에 지하수를 파면서 안 좋은 일들이 많이 일어났으며 마을이 황폐해 졌다고 한다.
이 마을은 창포 간척지의 피해 지역이기도 하다. 창포만을 막기 전에는 석화를 비롯하여 낙지와 숭어 등 수산물을 잡아 적지 않은 수입을 올렸으나 창포만이 막히면서 이러한 황금 어장을 잃어버렸다. 현재 세대 당 농경지는 많지만 농사를 통해서 얻는 것은 창포만의 수익에 비해 훨씬 미치지 못한다고 한다.
이 마을에는 유명한 서당 훈장이 있었다. 곽기영이라는 분으로 무안읍을 비롯한 인근 마을의 많은 사람들이 그분 밑에서 글을 배웠고 학문을 익혔다. 마을에는 그분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문도들이 힘을 합해 ‘우헌곽선생기영기적비’라고 세운 비가 있다.
흙담에 둘러싸인 삼강비가 있다. 일주문이 있는 이 비는 담 안에 ‘포산곽씨삼강비’가 있다. 포산은 현풍의 예전 지명이다. 삼강의 인물은 忠에 목사공 성귀(자-문징, 호-현주. 1606-1668)와 孝는 의완(1824-1870) 그리고 烈에 두형의 부인 김해김씨이다. 성귀는 병자호란 때 의병을 모집하여 활약하였으며 또한 곡식을 걷어서 군량미로 활용하기도 했다. 1963년에 지어졌다.
또한 삼강비와 사이를 두고 곽의완 효자각이 있다. 몽암 곽의완(1824-1870)은 1890년(고종27)에 그 효성이 지극함으로 인해 나라로부터 정여를 포상 받았다. 공은 6세 때 어머님을 잃고 아버님을 잘 모시더니 그가 장성했을 때 부친께서 실명의 위기에 처하자 눈 속의 오물을 혀로 씻어내며 지성으로 치료한지 3 개월 만에 눈병을 낫게 하였다.
그 후 아버지께서 노병으로 눕게 되자 손가락을 자르고 허벅지 살을 베어 공양하는 등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장례를 모신 뒤에 3년을 시묘하니 그가 무릎을 꿇었던 것은 구덩이가 파지고 눈물 흘린 곳엔 풀이 마르고 또 묘 밑에 우물이 솟아나 시묘생활을 도우니 그 우물을 마을 사람들이 「효자샘」이라 하였다. 학동 마을 열녀각의 곽씨는 곽의완 공의 고모이다. 현재 효자각은 정․측면 1칸의 팔작지붕의 목조건물이며 내부에는 3개의 편액이 있다.
마을에는 개척한지 50년이 넘는 서부교회가 있다. 또한 마을회관 앞 가정집에는 수형이 잘 잡힌 당산나무가 있다. 주민들은 많은 관심을 갖고 있지만 개인집에 있는 나무라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다. 남아있는 지명으로 벼가 잘 되었다 해서 붙여진 ‘왕대논골’이 있으며, 옥산골, 창개등, 갱본, 큰리리, 작은리리, 핑핑들, 서구테 등이 있고 교회 밑에 있는 들을 서미테라고 한다. 지금은 폐교가 된 현경남초등학교 맞은편에는 1988년에 세운 밀양박씨 재각이 있다. 景思齋라 부르는 이 재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 팔작지붕의 형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