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서2리 조산마을 - 망운면에서 가장 좋은 조망권을 가진 마을
- 작성일
- 2016.08.02 16:38
- 등록자
- 조OO
- 조회수
- 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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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을은 원래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피동리 조산 도무리 율리와 용교리 두모리 일부를 병합하여 무안군에 편입되었다. 현재 피서리에는 용교, 조산, 정착, 톱머리 등의 마을이 포함되어 있다. 조산은 율리(밤골)와 함께 피서2리에 속한다.
造山이란 지명의 유래는 숲이 형성되어 산을 이루어야 잘 살 수 있다는 속설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또 다른 이유도 있다. 목내에 있는 통샘이 여성의 성기를 닮아 비보를 하지 않으면 목내의 남자들이 피해를 입는다는 속설이 있었다. 해서 통샘에서 마주 보이는 이 마을에 우뚝 솟은 산을 조성했는데 그 이름이 조산이다. 마을유래지에 의하면 ‘마을이 형성될 당시에는 마을 가운데에 산이 있고 그 산 속에 절이 있어서 경관이 훌륭하다 하여 ‘造山’ 이라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주민들은 다르게 말하고 있다.
이 마을의 형성은 하율리에서 비롯되었다. 하율리는 비행장 아래에 있는 마을로 人家는 없고 현재는 밭으로 이용되고 있다. 300여년 전까지 그곳에서 주민들이 살았는데 터가 박하여 살인사건이 일어나는 등 궂은 일이 자주 발생하게 되자 현재의 마을로 옮겨왔다는 것이다. 그때 옮겨 온 대표적인 성씨가 김해김씨이다. 현재도 하율리 터에서 농작물을 경작하기 위해 밭을 갈 때면 당시에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생활자기들이 많이 나온다.
마을 형성의 다른 이유도 있다. 200여년 전에 돗재 안의 부자인 하동 정씨 정한기씨가 많은 농토를 가지고 살았는데 그 농장에 일하러 왔던 사람들이 일이 끝나도 돌아가지 않고 이곳에 머물게 되면서 형성된 마을이란 것이다. 해서 대표적인 성씨가 없고 여러 성씨들이 어울려서 살고 있다고 한다.
이 마을에는 비행장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이 있다. 일제강점기 이 마을 주민들은 망운비행장에 일하러 온 전국의 노무자들을 상대로 밥도 해주고 하숙도 했다. 당시에 방이 두 개 이상이면 반드시 방 하나를 제외하고는 전부 노무자들에게 내줘야 했다. 또한 비행장이 황토밭이어서 노무자들이 아침에 들어갈 때는 하얀 옷을 입고 들어갔다가 나올 때는 붉은 옷이 되어서 나왔다. 해서 비가 올 때는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인 살 수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주변이 벌건 진흙탕이 되었다.
지금은 비행장에 포함된 곳이 되었지만 솔개가 나[飛]는 고개의 의미를 지닌 솔개재라는 지명이 있었다. 주민들은 구름을 기다린다는 의미의 ‘망운’이나 ‘솔개재’라는 지명이 이곳에 비행장이 들어설 곳임을 암시했던 말이라고 보고 있다.
일제강점기 이 마을 주민이었던 고동렬씨가 선진 농법을 구사하여 많은 소득을 올렸다. 특히 고구마 농사에 탁월한 기술을 발휘하여 신품종인 수원42호를 개발하였는데 정읍출신으로 처가살이를 했던 그는 재배 기술 뿐 아니라 저장기술도 좋아 주변 농가에 비해 많은 소득을 올렸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한국전쟁 때 피해를 입어 목숨을 잃었다.
빨치산들이 봉화를 올렸다
톱머리가 막히기 전까지는 마을 앞 뻘 밭에서 주민들이 낙지 등 수산물을 채취하여 생활하였을 뿐 아니라 굴 양식장을 운영하기도 했다. 그러나 둑이 막히면서 뻘밭이 사라지고 생계를 도왔던 양식장도 등록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보상도 받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미리 등록을 했던 광양의 박수만(광만)이란 사람은 양식장 운영은 하지 않았으면서도 등록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상당한 보상을 받았다. 생산현장을 잃은 많은 주민들이 나름대로 대책위를 조직하여 대처하고 있으나 아직 해결을 보지 못하고 있다.
마을에서 제일 높은 곳을 무주봉이라 한다. 함평시장에서도 이 봉우리를 볼 수 있다고 할 만큼 높다. 이곳에 서면 주변의 탁 트인 광경이 들어온다. 특히 잘 다듬어진 망운비행장과 현경 동산리의 황토밭 그리고 서해안의 모습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지금은 창고가 들어서 있는 이 무주봉은 한국전쟁 때 이곳에서 활약했던 빨치산들이 서로 연락하기 위해 봉화불을 피웠던 곳이다.
운남 망운 지역은 6,25때 좌우 사상 대립이 유독 심했던 곳이다. 해서 무주봉의 봉화는 이 지역을 중심으로 청계 운남 현경 해제 등지에서 활동했던 빨치산들이 서로 연락을 할 때 사용했던 불이다. 무주봉을 포함한 도대봉과 대박산 옹산 그리고 감방산에 걸쳐서 올려졌던 봉화는 한국전쟁이 끝나고 나서는 더이상 올리지않았다.
이른바 ‘피서마을 21명의 비극’에 이 마을 주민도 포함될 뻔한 일이 있었다. 한국전쟁 당시 피서리 일대의 주민들이 분주소 습격을 계획하고 서로 변치 않기를 다짐하며 연판장을 작성했다. 그런데 피동 피서 용호동 마을의 주민들은 이름을 썼지만 이 마을 주민들은 사정이 있어 다음에 써 넣기로 하였다. 거사날짜를 기다리고 있는데 일행 중에서 배신자가 나왔다. 그 배신자는 연판장을 가져다가 분주소에 신고했다. 그날 저녁에 연판장의 서명자 모두는 죽창에 찔리거나 생매장을 당했다. 하지만 연판장에 서명하지 않은 이 마을 주민들은 모두 살아남았다.
1986년, 2001년, 2002년, 2006년 목포대학교 박물관에서 이 지역을 발굴조사 하였다. 여러 개의 옹관묘가 묻혀 있는 것이 확인되었으며 적갈색 연질토기편과 회청색 경질토기편 등 옹관이나 토기가 많이 발굴되었다.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마을 주변에 여러 기의 고분이 분포하였으나 민가와 밭을 조성하면서 많이 파괴되었다고 한다. 특히 구석기시대 유적이 발굴되어 학계의 주목을 받기도 하였다.
마을에 효자각과 효행비가 있다. 모두 비행장 부지로 들어갔던 피동마을에서 옮겨온 것이다. 효자각은 2001년에 지어진 것으로 안에는 ‘효자남파한양조공정려비’와 정려 현판이 걸려있다. 비는 1943년에 세운 조재형효행실적비이다. 남아있는 지명으로 발동기를 타고 다닌다고 해서 ‘발동기머리’와 무르들(마을 앞 들), 버드실, 솔개재(현재는 비행장에 속한 곳), 큰 돌, 수문통 등이 있다. 또한 망운시장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길에 수랑골이 있으며 종실골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