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서4리 외덕마을 - 서당골이라 불렸던 홍주 송씨의 동족 마을
- 작성일
- 2016.08.02 16:28
- 등록자
- 조OO
- 조회수
- 1081
첨부파일(5)
-
이미지 목서리 외덕1.JPG
349 hit/ 3.51 MB
-
이미지 외덕2.JPG
289 hit/ 4.07 MB
-
이미지 외덕3.JPG
283 hit/ 3.29 MB
-
이미지 외덕4.JPG
272 hit/ 3.35 MB
-
이미지 외덕5.JPG
290 hit/ 3.24 MB
외덕은 목서 3리에 속한 마을로 내덕 마을과 같이 붙어있다. 원래 내덕과 외덕은 한 마을로 德林이라 불렀다. 덕림이란 지명은 마을의 주산인 德雲山에서 비롯되었다. 이는 마을이 형성될 때 입향조가 덕운산 아래에서 터를 닦았기 때문이다. 덕운산은 조그마한 산이지만 홍주 송씨 문산으로 한켠에 김해김씨 묘와 양성이씨 묘가 있다. 지금도 마을 주변에는 소나무들이 많이 보이지만 예전에는 훨씬 많은 소나무들이 숲을 이루어 마을을 둘러싸고 있었다. 해서 마을 이름도 주변 환경의 영향을 받아 덕운산의 德과 소나무 숲의 林이 만나서 덕림이 되었다.
마을이 형성되기 전에는 이곳에 고분들이 많이 있었으며 특히 석곽묘가 마을 앞 뒤로 있었다고 한다. 이 마을에는 유씨와 남씨가 먼저 살았다고 하지만 지금은 이 성씨들이 마을에 살고 있지 않아서 공식적으로 이 마을의 입향조는 홍주 송씨 송필하다. 宋弼夏(1691-1756. 자-여보, 호-德雲庵)는 나주시 금천면 광암리에서 살았으나 뜻을 펴기엔 광암리가 여의치 않음을 알았다. 해서 좀 더 좋은 환경을 찾아다니다 1700년대 초기에 소나무로 둘러싸인 소쿠리 형국의 아담한 이곳을 발견하여 가솔들을 데리고 들어왔다. 입향조는 여기에 터를 잡은 이후 집안이 안정되자 곧 바로 조그만 초가를 지어 아이들을 가르치는 서당을 운영하였다.
이런 연유로 처음엔 이 마을을 서당골이라 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유명한 선생님이 있어 두모 같이 먼 마을에서도 이곳으로 학문을 배우러 왔다. 실지로 일로나 해제 같은 지역에서는 외덕이라 하는 것보다 서당골이라 해야 알아들었다. 이어서 1700년대 중반에는 나주 광암리에서 함께 살던 청주한씨 韓宗吉(1715-1754. 자-명보, 호-죽계)도 이 마을에 들어왔다.
이어 가솔들이 불어나자 가족의 일부가 1800년대 말에 마을의 아래쪽인 현재의 내덕으로 분가를 하였다. 주민들은 마을 이름을 덕림의 안쪽이라 하여 내덕이라 하였다. 1912년 일본인들이 만든 마을 자료를 보면 덕림과 내덕이 표기되어 있지만 외덕은 없다. 왜냐하면 1936년에 가서야 덕림을 외덕으로 고쳐 현재처럼 내덕과 외덕으로 나누어 불렀기 때문이다.
덕운산 아래에는 바위가 많았다
덕운산 밑으로 해안가에는 바위가 많아 이름과 사연이 있는 바위들이 널려 있었다. 가장 큰 바위는 油岩浦였다. 기름바위라고도 하는데 이는 이 바위에 고여 있던 물이 바위에 있는 철성분과 만나 흘러내리면서 마치 기름처럼 보인다하여 붙여진 이름인 듯하다. 다른 유래도 있다. 바위에 석양노을이 반사되면 바위가 반짝거리는데 이 모습을 보고 기름바위라고도 했다. 또한 이 바위는 크고 넓었던 이유로 주민들 뿐 아니라 주변 학교의 아이들이 소풍장소로도 널리 알려져 한자로 遊岩浦로 쓰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 때는 화장장이 되기도 하였다. 이곳에 살던 일본인들의 아이가 죽으면 이 바위 위에서 화장을 하였기 때문이다.
중바위가 있었다. 통샘 밑 100여 미터 되는 곳의 바다에 약 4톤 정도 크기의 바위가 있었는데 바위의 모양이 승려의 머리처럼 생겼다 하여 중바위라 불렀다. 예전에 아이를 낳지 못한 사람이 이 바위에 공을 들이고 아이를 낳은 적이 있어 주변에 널리 알려지기도 하였다. 이렇게 해서 태어난 아이의 이름을 중바우라 부르기도 하였다.
소녀포가 있었다. 유암포 옆 서쪽 개어덕 아래 바닷가에는 돌을 깎아 갯벌에 박아 놓은 돌기둥들이 20세기 초까지 여러 개가 있었는데 이 주변을 少女浦라 부른다. 전해오는 이야기는 옛날 나라에서 세금을 곡물로 받아들였는데 배의 정박지로 닻줄을 묶었던 곳으로 이곳에서 곡물을 하역하여 육로를 통해 영광으로 이송했다고 한다. 하지만 지명을 근거로 유추해 보면 과거 중국으로 소녀들을 공출한 우리나라의 역사를 보면 혹시 이곳에서 소녀들을 배에 태워 중국으로 갔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처럼 사연이 많은 바위들은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망운비행장을 조성하면서 조각 내어 비행장 기반을 조성하는데 써버렸다. 주민들이 두고두고 아쉬움을 갖고 있는 일이다. 마을에는 일제강점기 때 만든 비행기 격납고가 두 개가 있었으나 최씨 소유의 땅에 있는 격납고는 비행장으로 통하는 길이 나면서 없어졌고 나머지 하나는 가당이라 부르는 곳에 남아있다. 예전에 이 격납고는 집이 없는 외지인이 격납고 안에서 흙담집을 짓고 살기도 했다.
마을 곳곳에 축사가 있어 주거 환경에 어려움은 있어 보이지만 대체로 경제적인 여유가 있어 보인다. 목내의 통샘과 같은 이름의 샘이 있었다. 수량이 많았으며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해 주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일제강점기 때에는 망운비행장 건설로 주둔하고 있는 일본병사들 대부분이 먹었던 식수이기도 했으나 지금은 없다.
마을에는 碑가 많다
마을에 홍주송씨 사당이 있었다. 1756년 무렵에 건립된 것으로 마을 입향조 송필하와 부인인 해주오씨 두 분을 비롯한 선대조를 배향했다. 해서 이 마을에 시집 오는 宋氏家의 며느리들은 시가에 들어가기 전 반드시 사당에 들러 참배를 하고 가야하는 전통이 있었다. 하지만 1960년대에 문중에서 조그만 의견충돌이 있어 철거해버렸다.
한국전쟁 때 두 사람이 희생을 당했다(내덕의 희생자와 중복될 수도 있다). 이른바 배나무정 싸움 이후 마을에서 주민들이 무안읍으로 피난을 갔는데 그곳에서 부역자 색출과정 중 망운에 살았던 사람이 주민 두 사람을 지적해 그 자리에서 죽은 것이다.
1920년대 마을에서 시작했던 포패조합 즉 어촌계가 요즘 시들해졌다. 한때는 100여명이 양식장에 나가 굴 채취를 하였는데 현재는 조합원의 노령화로 5-6명만이 채취를 해 노동력만 있으면 굴 양식장에 나가 상당한 소득을 올릴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마을에는 여러 기의 비가 있다. 마을회관 앞에 2006년에 세운 효자문이 있으며 그 안에 삼성홍주송공광기효행비가 있다. 옆에는 같은 연도에 세운 송광연의 송덕비가 있다. 정자 앞에는 마을유래기가 있다. 마을 왼쪽 메까고지라 부르는 곳에 효열각 홍주송씨효절비가 있다. 홍주송씨 13세 명인(1834-1891)의 효도와 그의 부인 행주기씨(1831-1909)가 어린 조카를 길러 종손의 代이를 잇게 하였으며 효자였던 남편의 뜻을 이은 아내가 시부모 공양 뿐 아니라 집안을 일으켜 세운 공덕이 새겨져 있다. 건립 당시에는 비가 비각 내에 소재하고 있었으나 1999년 8월 태풍으로 인하여 도괴되어 2003년 4월 새로이 비와 비각을 건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또한 광산김씨열부비가 있다. 김씨는 송명해의 부인으로 그녀가 시집오기 전에는 집이 가난하였으나 그녀가 오면서부터는 살림이 늘어나 행복하게 살았다. 그러나 남편이 갑자기 목병에 걸려 말도 못하고 음식도 못 먹어 백방으로 손을 썼으나 낫지 못했다. 갑자기 임종을 당하자 부인이 단지를 세 차례나 하며 생명을 연장시키기도 하였다. 남편이 죽자 시부모를 정성으로 봉양하며 두 아이를 훌륭한 선비로 키웠다. 부모에게는 효부요, 남편에게는 열부이며 자식에게는 현모의 역할을 한 부인의 인생을 기리기 위해 손자가 열부비를 세운 것이다.
이밖에도 안산에는 송효열부광산김씨실적비가 있다. 송광철(1887-1918)의 처 의령남씨가 27세에 남편을 잃고 외아들을 잘 길렀으며 집안의 우애를 돈독히 하는데 몸소 실천하였기에 집안사람들이 뜻을 모아 1994년에 건립하였다. 그 외에도 묵헌처사송명순경모비와 국파처사송영식강학비가 있다.
남아있는 지명으로 뽕난거리 동네샘 벌내간 안산 수렁골 계비산 원논과 수문 빵가시 목너메 원개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