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룡4리 양두마을
- 작성일
- 2016.08.22 15:38
- 등록자
- 홍OO
- 조회수
- 979
교육열이 높았던 달성배씨 집성촌 마을 - 복룡4리 양두마을
양두 마을은 주민들이 편의상 즐겨 불렀던 지명이 마을 이름이 된 경우이다. 원래는 양도 마을이다. 그런데 양도보다는 양두가 훨씬 발음하기가 좋아 무심코 편리할 대로 불렀던 것이 현재의 마을 이름으로 굳어져 버린 것이다. 이 마을은 백련지에서 동쪽으로 2㎞ 정도 가면 나오는 마을이다. 행정 구역명으로는 일로읍 복룡4리에 해당된다.
이 마을을 부르는 이름이 세 가지가 있다. 양도, 양두, 양호도다. 원래의 이름은 섬의 지형이 염소를 닮았다 해서 붙인 羊島이다. 그러나 羊頭라는 지명은 지형이 염소의 머리를 닮아서 지은 이름이 아니라 발음에서 파생한 이름이다. 즉 양도로 발음하는 것보다 양두로 발음하는 것이 훨씬 자연스러워 양도보다 양두로 주민들의 의식이 굳어져 버린 것이다. 또한 양호도는 일제강점기 이 섬의 행정구역명이 영암군 시종면 羊湖里였는데 무안에 철도길이 열리고 해로보다 오히려 이 지역 육상의 교통로가 좋아지자 1917년 9월에 무안으로 편입된 것이다. 그때 불렀던 지명이 양호도였다.
복룡리 중에서 복룡촌과 사교 마을을 제외한 회산 두레미 용호동 양도 마을은 원래 섬이었다. 조선시대 지도에는 회산 또는 회도로 표시되기도 했는데 일제강점기 때 양도와 의산리 돈도리가 막히고 복룡촌 마을로 이어지는 선창목 아래에 둑이 막혀지면서 육지가 되었다.
현재 마을의 터는 와우봉(臥牛峰) 자락을 배경으로 영산강을 마주하고 있으며 원래는 신기동으로 불려졌던 곳이다. 80여년 전부터 섬인 양도에 살고 있던 30여 가구의 주민들이 하나 둘 건너 와 마을을 형성한 것이다. 당시 마을 앞에는 윤전개라는 개웅이 흐르고 있었는데 그 위로 나무 다리가 있어 건너다닐 수 있었다. 이어 영산강 물길이 막히면서 현재의 시멘트 다리가 되었다.
이 마을에는 고려 때에는 成씨가 살고 있었고, 조선 초기에는 선산 임씨가 살고 있었으나 숙종 이후 달성 배씨가 들어오면서 임씨들은 점차 마을을 떠났다고 한다. 현재도 양도 곳곳에는 선산 임씨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입향조는 달성 배씨 배윤우(1691-?, 자-도경, 호-만헌)로 1700년대 초에 영암에서 거주하다 이곳으로 와서 터를 잡았다. 만헌공은 동몽교관을 증직 받은 분으로 경전에 전심하여 후진을 양성하니 주변의 많은 선비들이 그의 뜻을 받들었다고 한다.
원래 양도는 영산강 하구점으로 뱃길을 재는 기점이었다. 즉 영산강이 막히기 전까지는 나주, 영암, 무안의 땅금이 되고 있는 이 섬 앞 영산강 수로의 중간지점을 일제가 하구점으로 삼은 것이다. 해서 영산강의 길이를 115,8킬로미터로 알려 ‘영산강 삼백리’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영산강 하구언까지 영산강으로 인식해 ‘영산강 삼백오십리’라 한다.
영산강이 막히기 전까지는 이곳에는 50여척의 중선배가 드나들 정도로 성시를 이뤘다. 봄이면 이 배들이 서해안 백령도까지 올라가 조기를 잡아왔다. 배들이 다니면서 고기를 잡을 때까지만 해도 이 마을은 풍족하게 살았다. 특히 조기철이 되면 인근 마을의 아낙네들이 농산물과 고기의 물물교환을 위해 선창가에 용기를 늘어놓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이러한 흥청거림이 목포의 돈줄 노릇을 할 정도로 여유가 있어 작은 목포로 불리기도 했다. 물론 목포항보다도 더 큰 파시를 형성하였다. 하지만 해방이 되면서 일본인들이 물러나고 배를 잡는데 필요한 각종 어구들이 일본으로부터 들어오지 않으면서 활력을 잃었다.
이 마을은 교육열이 대단히 높았다. 풍부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일로읍내에서는 소문날 정도로 학생들이 많았다. 한때는 일로 기관장의 대부분이 이 마을 출신들로 채워질 정도였다. 특히 공무원과 교사가 많아 주변 마을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전쟁 때는 공부를 많이 하고 똑똑한 사람들은 대부분 좌익으로 몰려 처형 당한 인사가 가장 많았던 마을이기도 하다.
양두 꼬락 젓은 그저 주어도 안 먹는다
이 마을에는 ‘회산 양두 꼬락 젓(꼴뚜기 젓)은 그저 주어도 안 먹는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각종 수산물을 비롯한 꼴뚜기가 많이 생산되었다. 또한 ‘일본인 구로다가 셈 파다 망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이 마을에는 물이 귀했다. 해서 이 마을의 어느 가정이나 얼마 전까지는 물을 담아두는 옹기들을 갖고 있었다.
이 마을의 특산물은 숭어와 장어이다. 특히 숭어는 주민들의 말을 빌리자면 ‘개웅에서 막대로 물을 치면 숭어가 놀라서 튀어 오르는데 그때 갈대 엮은 발을 밑에다 두면 우두둑 고기들이 떨어 진다’할 정도로 많이 그리고 쉽게 잡을 수 있었다고 한다. 양도 섬의 주산이 두남산(일명 덕두산, 떡두산)이다. 이 산은 제비 형국(연소등)이라 무덤에 석물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 산 자락에 효부각과 양호단 그리고 원모재가 있다. 1989년에 세워진 효부각은 면와 배회두 선생의 부인인 전주 최씨의 효행을 그리는 비각이다.
羊湖壇은 현재의 마을에서 보면 맞은편 두남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으며 1975년 11월 15일에 후손들이 기금을 모아 세운 달성 배씨의 문중단이다. 이 단에는 배운용(달성군, 달성배씨의 수관조)과 배윤우(입향조, 권수암 선생의 문인)를 모시고 있다. 두 분의 충의, 문장,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단이며 매년 3월 5일에 제사를 지낸다. 양호단 안에는 1987년에 세운 ‘동몽교관만헌배공사적비’가 있다. 또한 원모재는 4칸 팔작지붕으로 1957년에 세웠으며 1986년에 중수했다. 재각 안에는 15개의 현판이 걸려 있으며 몸채를 빙 둘러서 마루를 깔았다. 재각 바로 아래에는 납따바위가 있다.
남아있는 지명으로 용당끝이 있다. 용의 꼬리로도 알려진 이곳은 와우봉 끝 자락을 돌아오는 모퉁이를 말하는 지명이다. 용당끝과 의산리 돈도리 마을이 연결되면서 비로소 주민들이 경제적으로 넉넉하게 되었다. 또한 어장터가 있다. 어장터의 흙은 둑을 막는데 사용하였다. 또한 마을 앞 개웅을 윤전개라 하며 마을 뒤의 개웅은 모릿개라 한다.
이 마을은 몽탄면 당호리의 갈산 마을과 상관관계가 있다. 이 섬의 형상이 염소와 같다 해서 양도라 했는데, 몽탄에는 염소의 먹이인 칡넝쿨을 의미하는 갈산(葛山)이라는 마을이 있다. 이 두 마을이 서로 바라보는 관계여서 한 곳이 흥하면 다른 곳은 빈약해지는 관계이다. 달성배씨 동족마을이며 타성은 몇 가구만 있다. 마을 앞에 1988년에 세운 달성배씨만헌공파세거비와 1989년에 세운 면와거사배회두공적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