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암3리 진사동마을
- 작성일
- 2016.08.22 15:12
- 등록자
- 홍OO
-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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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개산시회를 열었던 마을 - 광암3리 진사동 마을
진사동은 광암3리에 해당하는 마을로 진사를 배출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 앞에 있는 옥산골은 순흥안씨와 의령옥씨들이 살았다는 골짜기인데 그곳에서 옥씨가 진사를 배출했다는 것이다. 현재 옥산골에는 주민들이 한 가구도 살고 있지 않아 언제 누가 진사에 등과했는지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없다. 하지만 지금도 옥산골 곳곳에 기와조각 등 살림 파편들이 나와 예전에 사람이 살았음을 추정할 수 있는 각종 흔적들이 발견되고 있을 뿐이다.
이 마을에 주된 성씨는 여양 진씨와 도강 김씨다. 입향조를 찾기 위해 여양 진씨의 대동보를 봤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도강 김씨의 입향조는 뚜렷이 나온다. 해서 이 마을 입향조로 추정할 수 있는 사람이 도강 김씨 金 點(자-이점, 호-고와. 1573-1634)이다. 공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의 부장으로 명량대첩에 참전하여 혁혁한 공을 세웠다. 전쟁이 끝난 후 나라로부터 선무공신에 등록되어 녹권을 받기도 했다.
공은 강진에서 이주해와 일로 농공단지 안에 있었던 극산동에 자리 잡았다. 지금은 농공단지가 들어서 재각 등의 흔적을 찾을 수 없지만 묘비 등을 통해서 1600년대 초에 극산재에서 이 마을로 들어왔음을 알 수 있다. 극산재 뒤에 있는 산은 ‘태봉봉우리’라 부르는데 수많은 도굴꾼들이 찾아오는 표적이었다.
문헌을 통해서 본 이 마을의 역사는 1789년의 호구총수에 무안현 노촌면 進士洞으로 나온다. 1912년에는 무안군 일로면 진사동으로, 1917년의 자료엔 무안군 일로면 광암리 진사동으로 나온다.
마을 뒤 초당인 도남재가 있었던 부근에 솔등재라고 부르는 지명이 있다. 솔등재가 있는 재는 예전에 삼향이나 목포에서 한양으로 올라가는 길목인데 마을 주민들이 그곳에 진사를 배출했다는 표시로 솔대를 세운 것이 지명이 되었던 것이다. 다른 지역에선 솔대길 또는 솔대배미라 해서 진사 배출을 기념했다. 솔등재 옆에는 주막도 있었다.
마을은 윗 진사동과 아래 진사동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진등으로 연결된 골짜기 형국에 자리 잡고 있다. 마을 뒤 동산을 지나 무재봉 개산 매봉으로 이어지는 산 사이에 자리 잡았다. 마을 앞에는 옥산골과 토석 채취를 하고 있는 산이 있으며 마을 왼쪽으로는 800번 버스가 지나는 길이 있다. 또한 마을 오른쪽으로는 고속도로와 고속철도가 지나고 있어 예전에는 고요했을 것으로 여겨지는 마을이 현재는 수선스러워 보인다.
마을 입구에 두 개의 비석이 있다. 1932년에 세운 개산녹음시회기념비와 1988년에 세운 개산녹음시회사적비가 그것이다. 구한말 이 마을의 큰 선비였던 도남 진병영(일명 진희문)선생을 기리는 비다. 도남 선생은 개산 아래에 초당인 도남재를 짓고 후학들을 가르쳤다. 또한 해마다 녹음이 짙어지는 5-6월이면 무안 일대는 물론 목포, 함평, 나주. 영암 등지의 선비들이 이곳 개산재 초당에 모여 綠陰詩會를 열었다. 이들은 시문을 통해 학문의 도도함을 널리 알려 주위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하지만 비문 외에는 도남 선생의 학문적 업적을 알 수 있는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아 아쉬웠다. 원래 이 비석은 개산의 도남재가 있었던 곳에 있었는데 서해안 고속도로가 나면서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다.
開山은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어
開山은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다. 주민들은 잘 모르고 있지만 본래는 산을 개척하여 사원을 건축하는 일을 지칭하는 불교용어이다. 즉 고대에는 사원들이 깊은 산 속에 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개산이라 하였으며, 사원의 제1대 住持를 개산이라 높여 부르기도 하였다. 후대에 이르러서는 이외에도 한 종파의 창시자를 칭하여 開山祖師라 하였다. 전해지는 말로는 증산교의 창시자가 이 마을 출신 진희문이라는 말이 있는 것을 보면 무심히 넘어갈 것은 아니다. 특히 개산녹음시회는 절을 창건한 승려의 죽은 날을 기념하는 개산법회를 연상시켜 여러모로 흥미를 갖게 하는 지명이다.
윗 진사동 앞에는 일제강점기 말에 축조한 저수지가 있다. 현재 저수지 옆에는 토석 채취를 위해 산을 깎아내린 흔적이 있었다. 여기서 나온 흙으로 남악 신도시 건설을 위한 터 다짐용으로 사용했는데 현재는 공사가 중단된 상태다.
저수지 밑에는 이 마을 입향조가 심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팽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원래는 6그루의 나무가 있었다고 하나 나머지는 고사되어 버리고 한 그루만 남은 것이다. 수령은 400여년에 둘레가 5미터 10으로 수형이 잘 잡혀있다. 예전에는 이곳에서 윗마을 아랫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마을일을 협의하고 결정했던 곳이다. 또한 들독들이 많이 있어서 남정네들이 힘자랑을 하였던 곳이기도 하다. 현재 들독은 찾을 수가 없다.
이 마을에서는 일로의 다른 마을처럼 담배농사를 많이 짓고 있다. 대부분 주변 마을에서 이 마을 땅을 임대하여 짓고 있으나 시금치와 함께 마을의 주 소득원이 되고 있다.
옆 마을 상신기리 탐방 때 그 마을 주민들이 기산난리(개산난리)를 말한 적이 있었다. 개산 고개는 1894년 갑오년에 동학 농민군들이 제폭구민 구국항쟁을 외치면서 몽탄에서 삼향으로 이동할 때 일본군을 포함한 토포군을 만나 싸웠던 현장이다. 이때 상신기리 마을 주민이 붙잡혀 곤욕을 치뤘다는 사실이 있었던 곳인데 이 마을 주민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개산의 의미를 되새겨 볼 때 흥미로운 마을임에는 틀림없다.
남아있는 지명으로 옥산골 옆의 새터골이 있으며 현재 재제소가 있는 곳을 배달등이라 부른다. 예전에 영산강 물이 들어왔을 때 배가 닿았던 곳이라 붙여진 지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