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정4리 신원목마을
- 작성일
- 2016.08.22 14:55
- 등록자
- 홍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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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만들어진 간척지 길목의 마을 - 산정4리 신원목 마을
신원목은 일로읍 산정4리에 해당하는 마을로 우데미 아래데미 모퉁아리 산속 마을을 포함하고 있다. 원래는 산정 3리 도덕지 마을과 한 구역이었으나 산정4리로 分里된 것은 20여년에 지나지 않는다.
주민들은 행정구역이 분리될 때 주민들의 의견이 무시되고 당시 이장 한 사람의 의견만 반영이 되면서 마을의 역사성이나 현실이 무시되었다고 주장한다. 즉 신원목은 역사적으로도 오래 전에 형성되었고 마을의 뿌리도 깊은 반면에 도덕지는 1920년대 영화농장이 조성되면서 형성된 신흥마을인데 도덕지가 3리가 되고 신원목이 4리로 된 것은 잘못된 행정이라고 말한다. 특히 당시 이장이 도덕지 사람이어서 마을의 오랜 역사나 문화가 배제된 채 한 사람의 의견만 따라 행정구역이 지정된 것은 분명 잘못된 행정이었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지명도 원래는 신언목이었다. ‘-목’이라는 지명은 중요한 길목이라는 의미를 갖는데 새로 만들어진 간척지의 중요한 길목이라는 의미를 지닌 이름이다. 마을 입구 표지석에는 ‘新興目’이라 포기되어 있는데 이것도 잘못된 표기이다. 산정리를 포함하여 광암리 상신기리 복룡리 등 4개리에 펼쳐져 있는 간척지는 조선시대에 세 차례의 간척을 통해서 형성한 것이다. 처음에는 사교 앞 마을에서 학두리까지 1차 제방을 쌓고 2차는 복룡촌에서 용호동까지, 3차는 양호도에서 선창목까지 둑을 쌓으면서 현재의 넓은 들이 만들어졌다.
이때 용호동에서 복룡촌으로 가는 다리 부근을 선창목이라 하고 복룡촌 마을의 안산 뒤를 장구목이라 부르는 지명이 나온다. 신언목도 새로 형성된 간척지의 주요한 길목에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는 신언목이란 지명이 빠지고 월곡과 반곡이 나온다. 현재 쓰여지고 있는 신원목은 反谷(밀양박씨 비문에는 한자 표기가 盤谷-마을의 형국이 소반과 같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이란 지명 대신에 붙여진 이름이다.
또한 마을회관 앞에 있는 표지석에는 ‘이곳 신원목 마을은 옛적에 소뿔을 닮았다 해서 반곡으로 불리우다 일제강점기 때 영산강을 막아 간척을 하여 농지가 확대되고 연꽃 방죽이 생기면서 새로운 들녘마을이란 의미를 갖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원래의 지명유래와는 다르다.
문헌을 통해서 본 지명의 변화는 1789년의 호구총수에 노촌면 新言目리로 기록되었다. 이후 1912년의 자료에는 일로면 月谷동 反谷동으로 나오고 新言目리가 빠졌다. 이후 1917년의 자료에는 일로면 산정리 월곡동 반곡동으로 나온다. 그리고 1987년의 자료에는 행정구역명에 월곡과 반곡은 빠지고 일로읍 산정3리 道德地로 나온다.
백련단지가 마을에 피해를 주어
이 마을은 밀양박씨 집성촌으로서 입향조는 朴重愛(자-영수, 호-묵암. 1735 - 1821)이다. 아래까끔이라 부르는 마을 뒷 동산의 묘소에 있는 묵암 공 비문에는 ‘공은 천품이 총명하고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매사에 공명정대하니 주변 사람들이 모두 흠모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박씨 족보를 볼 수 없어 확인할 수 없다.
마을 앞은 동양 최대라고 일컬어지는 백련단지가 들어서 있다. 회산 백련지(또는 복룡지 라고도 불렀음)는 일제의 암울했던 시대에 조상들의 피와 땀으로 축조된 저수지로 의산리의 돈도리 앞에 원둑이 쌓아지고 영화농장이 만들어지면서 간척지 논에 물을 대기 위해 막아놓은 방죽이었다. 주민들이 회산방죽 또는 영화방죽으로도 불렀던 이 방죽은 몽탄면의 당호 저수지에서 물을 끌어와 영화농장에 사용하였다. 면적은 10만여 평으로 두 개의 저수지가 합하여져 인근 농장 250ha의 농경지에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농작물의 젖줄 역할을 하였으나 1981년 영산강 하구 둑이 건설된 후 사실상 농업용수의 기능을 상실하였다.
이 방죽에 처음 백련이 나타난 것은 구 원둑이 막아지면서인데 지금은 없어져 버린 저수지 옆 덕애 마을 주민들이 가꾸어 오면서 현재까지 이어졌다. 주민들에 따라서는 일본인들이 하나 둘씩 심었던 것이 넓게 퍼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연(蓮)은 물을 많이 흡수하기 때문에 방죽을 관리하던 농지조합에서는 골머리를 앓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물이 부족해 농업용수가 부족해지기 때문이다. 해서 농조에서는 70년대부터 몇 차례에 걸쳐서 경상도 대구 사람들에게 연을 팔았다. 그러다 영산강이 막히고 지방자치체가 실시되면서 연방죽이 군 소유가 되고 백련이 각광을 받으면서 백련단지가 조성되었던 것이다.
주민들은 방죽이 들어서면서 마을 인심이 사나워졌다고 한다. 주민들에게 직접적인 소득은 별로 없고 주변만 복잡해졌다는 것이다. 기껏해야 주민 몇 사람이 축제 기간 동안 노점상을 벌여 농산물 판매 등으로 얻는 소득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좋은 것도 있다고 한다. 마을길이 넓어지고 포장이 잘 되어 다니기에 편한 점이다.
영화 농장 주변 마을이 대부분 그렇듯이 이 마을도 농장이 조성되기 전에는 무척이나 어려운 생활을 했다. 그러다 영산강이 막히면서 비로소 주민들이 잘 살게 되었다. 마을 뒤 묘지가 많은 곳을 욋골이라 하고 그 뒤를 안골이라 부른다. 조금나들이라는 지명도 있다. 조금 때가 되면 물이 들어온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주민들의 목소리가 마을 밖을 벗어난 적이 없을 정도로 주민들이 화합이 잘 되고 협동심이 강했다. 해서 한국전쟁 때는 주민 중 한 사람의 피해도 없었음을 자랑하기도 한다. 마을 뒤 묏등이라고 부르는 지역에 광주시 지정 인간문화재인 서창순 선생 묘지가 있으며 옆에는 2000년 12월에 세운 추모비가 있다. 원래 용산리 농장 마을에 있던 것을 옮긴 것이라 한다. 마을 입구에 시온영광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