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정1리 산정마을
- 작성일
- 2016.08.22 14:30
- 등록자
- 홍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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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 선생의 흔적이 있는 마을 - 산정1리 산정마을
산정은 일로읍 소재지에서 몽탄 방면으로 1㎞ 쯤 가면 나오는 마을이다. 예전에는 마을 가운데로 호남선 철도가 지나 아랫마을에서 윗마을로 가려면 어려움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어려움이 없는 행정구역명이 일로읍 산정1리인 산정 마을이다.
예전에 이 마을은 송정(암수 팽나무가 마을의 수호신처럼 자라고 있다), 죽촌(대나무가 많다), 원산정, 연지원, 도루봉 등 5개 마을이 모여서 산정 마을을 형성하고 있었다. 하지만 현재는 송정 죽촌 원산정 세 마을만 남아있다.
‘山亭’이란 이름의 유래는 마을 유래지를 보면 ‘이 마을에 다산 정약용 [丁若鏞, 1762.6.16 ~ 1836.2.22] 선생이 머물렀다는 산이 있다고 한다. 처음에는 다산 선생이 이 산에서 머물렀다 하여 마을 이름을 ‘山在’라 하였으나 지금의 이름인 ‘山亭’으로 바뀐 연유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알 수 없다.’ 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오래전 채록한 자료를 보면 이 마을의 뒷산이 ‘복개산(覆蓋山)’이고 광암리에서 이 마을을 바라 볼 때 산이 마치 정자의 지붕처럼 보여서 ‘山亭’이라 했다 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복개산의 山과 송정 마을의 亭을 합쳐서 만든 지명이 아니었을까 여겨진다. 현재의 주민들은 마을 이름의 유래를 모르고 있었다.
산정리에 있는 ‘부사정공나주정씨묘표’에서는 무안의 입향조로 26세 정대흥(丁大興. 1428 - 1498. 호-詩翁)공으로 보고 있다. 공은 청계면 송현리에서 1428년에 태어났는데 자품이 영수하고 지개가 견확하여 학문에서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깨우치는 수재였다. 단종 조에 급제하여 통훈대부 호조정랑 집현전학사를 역임하였으며 연안부사를 제수 받았다. 이후 사육신의 정변이 있고서 속세의 덧없음을 깨달은 공은 벼슬을 버리고 청계면 송현리에 은둔하여 자연을 벗 삼아 유유자적하였다.
이어 후손들이 청계 복룡리 장자리와 일로 월암리 강남산등에 일가를 이루었다. 이 마을을 입향조는 31세 丁宗萬(1575-1636. 자-以德)이다. 공은 무과에 등과하여 어모장군 훈련판관을 역임하였다.
실지로 마을 주민들도 입향조가 450여년 전(15대조에 해당)에 청계면 송현리 솔태에서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문헌으로 지명의 변화를 살펴보면 1789년의 자료인 호구총수에는 노촌면 산정리로 표기되었고 1912년의 자료에는 일로면 산정리로 나온다.
이 마을에는 다산 정약용 선생과 관련된 사당이 있다. 사당이 생긴 이유는 ‘다산 선생이 강진에서 유배가 끝나고 한양으로 갈 때 평소에 정이 두터웠던 당시 제자이자 친족이었던 눌재 정근철의 청을 받아 한 달여 동안 이 마을에서 머물며 후학들을 가르치고 강론을 하였던데’서 비롯된다.
담배와 시금치를 많이 재배
다시 말하자면 평소에 다산 선생의 학문을 흠모하고 같은 친족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던 눌재 선생의 현손인 정재연이 사재를 떨어 이 마을에 1967년에 ‘다산사(茶山祠)’를 건립하고 추모하였다. 나아가 1976년에는 백범 김구 선생을 함께 모셔 매년 음력 3월 17일에 지역의 유림들과 함께 제사를 모셨다.
현재 다산사는 없어지고 ‘다산정선생유적비’와 ‘문경공다산정선생추모단’이 일로읍 월암리 5구 강남산 마을에 다른 유적비들과 함께 모셔져 있다. 또한 복개산 기슭에 있는 나주 정씨의 사당인 금산재에 다산 선생이 현판에 친필을 남겼다고 하나 확인할 수 없었다. 금산재는 정면 6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1884년에 지었으며 주변 관리가 잘되어 있다. 재각 뒤에는 나주정씨 묘들이 자리하고 있으며 재각 안에는 금산재기 등 8개의 현판이 걸려 있다.
이 마을에는 죽어서도 부친을 봉양했다는 효자각이 있다. ‘故효자성제정공지비’라는 효자각으로 1842년에 세웠는데 효행도 각별하지만 효자각의 건축도 특이하다. 화강암으로 만들었는데 지붕이 아치형이며 비를 둘러싼 울타리도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없는 형태이다. 효자각의 주인은 丁復哲(자-順明, 호-誠齋. 1774-1814)이다. 정복철은 1774년에 이웃 마을인 광암리에서 태어났다. 성제공은 어려서부터 천성이 온후하고 글 읽기를 좋아하여 아버지의 마음을 항상 즐겁게 하면서 몸 가지기를 효도로서 근본으로 삼아 생활하였던 분이다.
또한 지금은 월암리로 이거하였지만 정완의 기적비가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정완은 선조 병자년에 무안군 청계면 송현리에서 태어났다. 16세에 무과에 급제하고 1년 후인 17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 장군 군대에 편입되어 당포싸움, 한산도싸움, 진도싸움 등 여러 전투에 참여하여 혁혁한 공을 세워 임진왜란 공신으로 선무훈록에 기록되었다. 그 후 영조 임금이 忠節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忠良祠에 배향하였다. 후손들은 충절공의 德業을 오래 기리고자 공이 만년에 기거하던 일로읍 산정리에 忠節祠를 지어 문중에서 제사를 받들며 후세의 귀감으로 삼고 있다.’고 정리했으나 충절사란 사당의 존재 여부는 알 수가 없고 월암리 5구에 ‘충절문’과 ‘충절공정완기적비’ 가 있어 역사를 말해주고 있을 뿐이다.
마을 앞에 펼쳐져 있는 농지는 학두리와 사교마을에 연결된 둑으로 인하여 형성된 농지이다. 마을 앞에는 아직도 배들이 드나들었다는 지명이 남아있다. 마을의 주 소득원은 담배와 시금치 그리고 갓이다. 양파의 고장인 무안에 속하면서도 일로읍과 몽탄면과 삼향읍은 양파 재배를 소규모로 하고 대신 담배와 시금치를 많이 심는다. 기후와 토질 때문이라고 한다.
남아있는 지명으로는 배들이, 연지나무골(예전에 연지꽃 나무가 많이 있었으나 현재는 한그루도 남아있지 않다), 간대골 대삽안 새실[鳥谷]등이 있으며 40여 가구에 60여명의 주민이 있으나 남자는 모두 합쳐도 15명뿐으로 여성이 절대적으로 많다. 이장의 푸념처럼 ‘무엇인가 새로운 사업을 하고자 하여도 젊은 사람이 없어 엄두조차 내지 못 한다’는 말이 결코 엄살은 아닌 듯하다. 마을에 30여년이 넘은 성덕교회가 있으며 일로읍에서 들어오는 길 입구에 ‘초산정재연경로비’가 서있다. 정미소가 남아있으며 송정마을에 2개 인동마을과 경계에 7개의 고인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