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3리 전리 마을 - 방천제(防川祭)를 지냈던 마을
- 작성일
- 2016.07.26 16:33
- 등록자
- 문OO
-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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箭里는 사마3리에 속한 마을로 청천리 앞 농업시험장에서 창포 쪽으로 1㎞ 정도 가면 나오는 마을이다. 깃대봉을 배경으로 하고 주치봉을 마주하고 있다. 이곳은 조선시대에 화살을 만들던 마을이 아닌가 추정되지만 지금은 ‘전리’에서 소리나는 대로 표기한 ‘節里’라 부르고 있다. 주민들은 ‘절리’에 대해 절개를 지킨 여자가 살았던 마을 또는 마을유래지 표기처럼 화설당 서쪽에 있는 마을로 청수천 가에 있는데 그 하천에서 풍겨 나오는 계절의 향기가 절기마다 뚜렷하다 해서 불렀다는 의미로 알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다르다. 우선 1789년 호구총수라는 문헌에 箭里로 나온다. 箭은 화살대를 만들기에 적합한 작달막한 대나무를 뜻하거나 화살을 뜻하기도 한다. 그런데 마을 이름에 화살이 들어간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창포만 건너 맞은 편 마을인 평용 마을에 있었던 활터와 연관이 있어 보인다. 즉 평용 마을은 예전에 國倉이 있었던 곳인데 그곳의 관리들이 활터를 이용했던 것이다. 해서 그 마을에서 필요로 했던 화살을 만들었던 곳이 바로 이 마을이 아닌가 여겨진다. 이렇게 추정할 수 있었던 것은 마을 곳곳에 시누대가 자라고 있었으며 주민들 스스로 알고 있듯이 주변 마을에서 이 마을 주민들에게 ‘절리놈’이라 하며 천대했다는 사실 등이다.
이후 일제 강점기 때는 箭里라는 지명이 사라지고 1912년과 1917년의 자료에 南溪洞으로 나온다. 남계라는 지명은 남안리 남쪽 시냇가에 자리 잡은 마을이라는 의미다. 하지만 광복 이후 다시 전리라는 지명을 쓰지만 원래의 뜻은 사라지고 소리나는 대로 절리라 표기하여 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구전에 의하면 입향조는 300여년 전에 들어온 탐진최씨 최광국이다. 그는 낙향하여 산천을 구경하며 돌아다니다 이곳에 이르러 잠시 쉬었는데, 사방을 둘러보니 앞에는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뒤편에는 파란 파도가 넘실거려 그 경관이 너무 아름다워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그후로 경주정씨와 진주강씨가 입향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무안세적지에 입향조는 崔天綱(호-淸隱, 영조대)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나주 초동에서 살았으나 이곳이 살기 좋은 곳으로 여겨져 자손대대로 번영하며 살 수 있도록 옮겨왔다는 기록이다. 특히 효제를 실천하고 독서를 하며 자손들에게 의롭게 살 것을 가르쳤다고 한다.
이 마을은 창포만이 간척이 되기 전에는 마을이 반도형으로 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었으며 지층이 바위로 이루어졌다. 해서 예전부터 물이 귀한 지역이었다. 1990년대 이전까지는 현재의 무안읍 평용리의 삼로동과 같은 사마3리였으나 90년대 행정구역 개편 때 분리되어 현재까지 독자적인 마을로 이루어졌다. 마을의 세대수가 15가구 안팎으로 늘 일정하며 세대간 빈부의 차이도 없다. 마을의 청년들이 억세고 단합이 잘 되어 주변 마을에서 어려워했다. 마을의 뒷산을 깃대봉이라 하며 측량 표지석이 있다.
주민들은 마을 중간에 있는 팽나무를 중심으로 아랫 마을은 절리, 윗 마을은 남계로 분리하여 부르고 있었다. 주민들은 마을 능선에서 숯구덩이와 옹기를 구은 후에 나오는 찌꺼기 등이 발견되어 혹시 이곳에 옹기를 굽는 곳이 있었지 않았는가 여기고 있다. 또한 일제 강점기 때는 정참사라는 사람이 현재 대밭으로 변해있는 곳에 선대 묘를 썼다. 그리고 재각을 두어 묘를 관리하였는데 그때만 해도 마을의 규모가 괜찮았다고 한다. 당시 정참사는 무안 제일의 부자였다. 하지만 지금은 정씨 묘를 몽탄면 달산리로 이장해 가면서 재각과 관리사는 무너지고 잡초가 우거져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
한국 근대사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마을
이 마을에는 동학군들의 아픔이 배여있는 장소가 있다. 포구로 사용했던 바우백이다. 마을 전체의 기반을 이루고 있는 바위가 창포만 쪽으로 뻗어 낭떠러지를 이루면서 천연의 포구를 이루었던 곳이 바우백이인데 서해 바다로 나가거나 한양 등으로 나갈 때 이용했던 포구이다.
윗마을인 청천리의 맑으내는 동학봉기 때 농민들의 의사기구인 집강소가 설치되는 등 동학군들의 활동 거점이었다. 또한 동학군들이 창포만을 이용해 해제의 동학 연병장까지 오가면서 활동하였다. 동학이 실패로 끝나면서 무안 지역의 동학군만 아니라 타 지역의 동학군들이 관헌의 눈을 피해 배를 타고 도망가고자 이곳 창포만의 바우백이로 숨어들었다. 그러나 이미 낌새를 알고 바우백이에서 지키고 있던 일본군과 관헌들에게 붙잡혀 수많은 사람들이 죽은 것이다.
바우백이의 아래는 지형적인 여건 때문에 청천리 남안리 평용리의 물이 모이는 지역이라 모래가 많이 쌓이는 곳이었다. 해서 여름철에는 해수찜 하러 인근 마을에서 몰려들었다. 뿐만 아니라 이곳에 모인 모래는 주변 시군에 건축자재로 팔려가기도 했다.
얼마 전까지 마을에서는 방천제(防川祭)를 지냈다. 갯물이 들어오는 둑에서 백중날 저녁에 지내는 제사를 말한다. 둑이 무너지지 말라고 地神 海神께 지내는 제사로 그날에는 마을의 모든 주민이 나와 둑이 무너지지 않고 농사가 풍년이 들기를 기원했다.
마을 앞에서 서호리를 거쳐 상마리까지 나있는 도로는 소화 13년(1938년)에 만들어진 신작로다. 이 도로는 청계면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신작로인데 주변의 풍부한 농산물을 가져가기 위한 운송로이기도 하였다. 마을 앞에 병자샘이 있었다. 병자년에 팠거나 병자년에도 마르지 않았다는 샘인데 평용마을 청천리 화설당 등 농지에 전부 물을 댔던 샘이다. 지금은 메꿔지고 이름만 남았다.
이 마을은 목포형무소 탈옥사건이 일어나면서 곤욕을 치른 일이 있었다. 죄수들이 승달산 줄기를 타고 도피하면서 이 마을까지 몸을 숨기러 왔던 것이다. 옆 마을인 아래 호치에서는 많은 죄수들이 잡혀 죽었다. 당국에서는 주민들을 동원하여 전리에서 시루봉까지 인의 장막을 쳐서 죄수를 수색하기도 했다. 한국전쟁 때는 한가족 6명이 몰살 당하는 아픔도 있었다.
남은 지명으로 절터가 있었다는 간석골, 달건네, 족판머리, 팽나무개, 나들이개, 그리고 건강에 좋다 하여 이 마을 뿐 아니라 인근의 주민들까지 즐겨 목욕했다는 옥둠벙 등의 이름이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