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2리 사마동 마을 - 말[馬]을 길렀던 마을
- 작성일
- 2016.07.26 16:30
- 등록자
- 문OO
- 조회수
- 1058
첨부파일(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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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동은 사마2리에 속하는 마을로 원사마리라고도 불린다. 마을유래지에는 사마동의 지명유래에 대해서 ‘입향조가 사마원공 벼슬을 하여 그 직책 이름을 따라 마을 이름도 司馬洞이라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 왜냐하면 ‘司馬’라는 단어는 벼슬 이름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고려와 조선 시대 때의 生員과 進士를 뽑는 과거 제도의 하나인 ‘司馬試’에서 비롯된 말이기 때문이다.
굳이 벼슬로 말한다면 백제 때의 외관직 벼슬이었으며 조선 초기에는 훈련관의 종사품 벼슬을 나타내는 정도이다. 이후에는 사용하지 않았던 벼슬이다. 중국에서도 동한 및 삼국시대에는 병졸이나 과원들을 통솔했던 벼슬이라고 나오기도 한다. 굳이 풀이 한다면 사마원공 벼슬을 한 사람이 있어서 붙여진 마을 이름이 아니라 사마시에 합격한 사람이 살았다 해서 붙여진 마을 이름이 아닌가 한다.
하지만 다른 해석을 할 수도 있다. 司馬洞이 아닌 飼馬洞이 아닌가 여겨진다. 말[馬]을 관리했던 마을이다. 이 마을의 입향조는 전주최씨이다. 崔暘(1580 - ?. 자-창덕)이 1600년대 초반에 이 마을에 들어와서 터를 잡은 뒤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뒤이어 달성배씨와 진주정씨가 들어왔다. 최씨 후손의 증언에 의하면 ‘선조가 괜 바윗등 아래서 무안현감의 말을 길렀다’는 이야기를 들어왔다 고 한다. 괜바윗등은 마을 위쪽, 현재 폐차장 옆을 말하는 곳으로 고인돌이 많이 있었던 능선이다. ‘괜바윗등에는 4채의 기와집이 있었다’는 증언도 했다.
더구나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지명에 유독 말[馬]과 관련된 이름들이 많다. 우선 마을을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마협봉이 있으며 그 아래로 암구마봉, 숫구마봉이 있고 마을의 주산에 갈마봉이 있다. 지금도 마을에는 목마른 말이 물을 마셨다는 갈마봉 아래에 통샘이 있다. 특히 사마동 옆 아래호치에서는 馬房이 있었다. 마방이란 외양간 마굿간의 설비가 있는 주막집인데 제주도에서 사육된 말이 한양으로 올라가는 길에 잠시 쉬었다 가는 곳이다.
처음에 마을이 조성된 곳은 현재 수양주유소와 가스저장소 사이의 골짜기인데 주민들은 이곳을 구말고랑이라 부른다. 이 주변에 있는 사마저수지 아래에 서당골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기도 한다. 지금도 이 주변을 파 보면 기와조각 및 많은 그릇 조각들이 나온다. 또한 가스저장소 옆에는 땀딱샘이라 부르는 샘이 있는데 이 샘은 아무리 날이 가물러도 물이 마른 적이 없다고 한다. 이 샘물이 얼마나 시원했든지 그 물로 등목이나 목욕을 하면 땀띠가 없어진다고 해서 땀딱샘이라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아래로 내려 와 현재의 장소에서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마을은 사마동 마을과 虎南동(정)으로 이루어졌다. 호남동은 사마동 마을 앞의 조그만 마을로 원래는 정씨들 터였는데 한두 가구가 들어서면서 마을을 이루게 되었다. 虎南동의 유래는 湖南동 같은 정서적 의미가 아니라 虎峰 또는 虎齒 남쪽에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의 오른쪽에는 몇 그루의 소나무가 동각과 함께 방풍림 구실을 하고 있다. 1980년대 유당농원이 막히기 전까지는 그 밑에까지 창포만의 물이 들어왔던 것이다. 동각은 1998년에 세운 것으로 그 앞에는 표지석이 있다.
갈마봉에는 세 개의 몰무덤이 있어
뒷 마을인 화설당과 사마동을 가르고 있는 산이 갈마봉(渴馬峰)이며 마을로 넘어오는 등을 지릿골 또는 질흙골이라 하는데 현재 도자기 공장이 있는 주변 골짜기이다. 이 질흙골 주변에는 질 좋은 점토가 많이 나와 이 흙을 이용해 기와를 굽기도 하였으며 얼마 전까지 주민들은 이곳에서 나는 점토를 목포의 행남자기 공장에 팔기도 하였다. 지금은 밭이 되어버렸지만 예전에 기와 가마가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또 이 가마는 동학 농민 봉기 때 동학군들이 피신처로 사용한 곳이기도 하다.
갈마봉에는 세 개의 몰무덤이 있었는데 주민들은 임진왜란 등 난리에 죽은 사람들을 한꺼번에 묻었다 해서 몰무덤이라 했다 한다. 나중에는 발음이 전이되면서 말무덤이라 부르기도 한다. 현재는 모두 없어졌으며 밭으로 사용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곳에는 주민들이 고름장(고려장)이라 부르는 곳이 세 군데나 있었다.
괜바윗등은 고인돌이 있는 능선이란 의미로 5기의 고인돌이 남아 있었다. 주민들은 처음에는 한개만 남아 있다고 했으나 확인해본 결과 5기를 발견한 것이다. 함께 한 주민들의 말로는 예전에는 더 많은 고인돌이 있었는데 새마을 사업 등을 하면서 많이 가져가거나 돌을 쪼개서 사용했다고 한다. 마을은 지반이 거대한 석회층으로 이루어졌는데 낮은 지대에서 곡괭이로 바닥을 찍으면 ‘떵’ 하는 장구 소리가 나기도 한다.
이 마을에는 주위 지명을 이용한 옥녀봉의 전설이 있다. 즉 마협봉 줄기의 백운산에서 흰구름을 타고 내려오던 옥녀가 앞에 떠억 버티고 있는 호봉의 호랑이를 보고 놀라 주저앉아 버렸다.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던 옥녀는 장구를 치며 상좌와 옥녀소반 그리고 춤울 추며 거문고를 타면서 세월을 보냈다는 이야기이다. 여기서 호랑이는 호봉을 말하며 옥녀봉은 현재 사마저수지(건방죽이라고도 하며 1945년에 만들었다) 가운데 우뚝 서 있는 봉우리이다. 또한 상좌는 봉불사 뒤에 있는 봉우리이며 장무는 마을 뒤에 있는 장뭇등을 말한다. 또한 거문고는 진주 정씨의 선산의 거문고혈 자리를 말한다.
2006년 목포대학교 박물관에서 조사한 ‘사마동 유물산포지’가 있다. 이곳은 마을의 북쪽 해발 27미터의 구릉일대에 위치한 곳으로 마협봉에서 서쪽으로 뻗어 내리는 산자락의 말단부에 해당하는 곳으로 유물산포지의 앞으로 소하천이 흐르고 있다. 현재 이곳은 과수원과 밭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유물로는 적갈색연질토기편, 회청색연질토기편 등이 확인되었다. 하지만 주민들은 이러한 발굴조사가 있었는지 모르고 있었다. 호남동에는 진주 정씨의 재각인 ‘죽우재(竹友齋)’가 있는데 5개의 주련이 걸려있다. 4칸 팔작지붕으로 1983년에 지은 것이다. 재각 뒤에 진주 정씨 선산이 있다. 호남동 뒤에는 비구니사찰인 봉불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