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안3리 상천동 마을 - 좋은 샘이 있었던 마을
- 작성일
- 2016.07.26 16:25
- 등록자
- 문OO
-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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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泉洞은 까치내 상천동 윗호치 망뫼 등 네 개의 마을로 이루어졌으며 남안3리에 속한다. 깃대봉 수리봉 동뫼 저봉 조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마을 가운데는 비옥한 농지가 펼쳐져 있다. 마을은 조리형국으로 와우형이다. 마을 앞으로 흐르고 있는 태봉천이 드물게도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逆水이나 마을에 별 영향은 없으며 호봉산과 증봉을 마주하고 있다. 풍수적으로 복이 많으면 넘치는 형국이지만 편안한 생활을 즐길 수 있는 지형이다. 특히 물이 좋아 농사짓기에 좋은 마을이다.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마을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1917년의 조선면리동일람에서야 상천동으로 표기되었다. 4개의 마을 중에서 제일 먼저 형성된 마을은 상천동이다.
상천동은 좋은 샘이 있어서 붙여진 지명이다. 돼지형국인 뒷산에서 돼지의 젖꼭지에 해당하는 자리에서 물이 솟아나는데 수량이 많을 뿐 아니라 물맛이 좋기로 널리 알려진 샘이다. 뿐만 아니라 마을에 저수지가 없어도 농사를 지을 수 있을 만큼 물길이 좋아 편안하게 농사지을 수 있는 터다. 수량이 풍부할 뿐 아니라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해서 마을 주민 뿐 아니라 주변 마을 사람들에게까지 사랑을 받았다. 특히 맞은편 마을인 태봉 사람들은 마을에서 당산제를 지낼 때 일부러 이 마을까지 와서 샘제를 지내고 돌아가기도 했다.
이 마을의 입향조는 화설당 마을에서 분가해온 柳宗侃(1637-1702. 자-종인)이다. 화설당 柳 運공의 아들이다. 공은 이 마을에서 문화류씨 집성촌을 이루며 살았다. 상천동에 들어서있는 집들은 대부분 좌향이 북향이다. 지형적인 영향도 있지만 풍수적인 탓도 있다. 즉 뒷산이 죽은 돼지형국으로 猪峰이라 부른다. 주민들은 짓봉이라 부르고 있다. 풍수적으로 보면 까치내의 까치가 죽은 돼지를 먹으려고 날개를 펴고 있으나 수리봉의 매가 눈을 부라리고 있는 형국이다. 해서 서로 긴장관계가 유지되고 있어 마을 어딘가에는 좋은 터가 있어 보이는 지형이다.
망뫼 마을은 상천동에서 분가한 신생마을이다. 마을에는 상천교회가 자리 잡아 있다. 복룡리의 대곡마을에서 시작된 신앙이 결실을 맺어 세워진 교회이다.
호치(虎齒) 마을은 지형이 호랑이 이빨처럼 보인다는 의미로 이름만큼이나 억센 마을이었다. 실지로 외지인이 이 마을 앞을 지날 때면 발소리를 줄여야할 만큼 조심을 해야 했다고 한다. 해방 후 목포형무소 탈옥사건 때는 죄수들이 승달산 기슭을 타고 도망하면서 이 마을에 숨어들어 많이 잡혀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 예전엔 국도 1호선이 마을 앞을 지났을 뿐 아니라 주막이 세 개나 있을 정도로 교통의 중심지였다. 1945년 청계북국민학교로 개교한 청계북초등학교가 있다.
마을의 왼쪽 동뫼 뒤에는 절고랑이라 부르는 곳에 죽림정사라는 사찰이 있다. 40여년 전에 목포에서 사업을 했던 박찬규씨가 어머니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절이다. 원래 대밭이 있어서 죽림정사라 이름붙인 이 사찰은 찾아오는 신자가 많다.
이 절고랑은 작은골이라고도 부르며 작은 시장이 개설되었었다고 한다. 또한 이곳이 작은골이라면 무안읍 성남리 대곡은 큰 골에 해당되며 그곳에도 큰 시장이 열렸다고 하나 확인할 수 없다. 추정해보면 노점상 정도의 장이 아닐까 여겨진다. 왜냐하면 작은골과 큰골은 구로리 등 서남부 쪽의 사람들이 무안에 갈 때 지나가야 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칠성바위가 있었던 마을
마을에서 사마3리 전리 마을로 넘어가는 능선에 칠성바위가 있다. 지금은 야산개발로 7개의 바위 중 4개는 묻혀버리고 세 개만 남아있는데 가장 큰 바위가 길이가 1미터 40 정도로 작은 바위다. 해서 처음엔 7개의 고인돌이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실지 확인해보니 7개의 바위였다. 생각컨대 주민들이 칠성신앙 등 어떤 의식에 사용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주민들에게 칠성바위와 마을에 대해 물어보았지만 아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한국지명총람에는 칠성동이라는 마을과 칠성샘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마을에서 ‘花雪’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들을 수가 있었다. 우암 송시열선생이 귀양이 풀려 한양으로 올라갈 때 류운공과의 친분관계로 마을에 들렀다. 류운공은 대학자인 우암선생이 방문한 것을 영광으로 여겨 자기 딸을 우암선생과 가약을 맺게 했다. 우암선생은 류운공의 딸을 보고 그 아름다움에 반해 ‘눈 가운데 피어있는 한떨기 꽃과 같구나’하며 극찬을 했는데 이때 처음으로 화설이란 구절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큰 깃재 작은깃재 동뫼 자라목 양목고개 드롱샘 입석교 등의 지명이 남아있다. 이중 양목고개 아래에 있는 드롱샘 주변에서는 수많은 자기 파편과 기와조각 등이 발견되었으며 똥장군도 발견되었다. 특히 목포대학교 박물관에서 펴낸 자료에도 마을 주변에 두 곳의 유물산포지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곳에서 나온 유물은 옹관편 적갈색연질토기편 회청색경질토기편과 많은 자기류 기와류 등이 수습되었다고 한다.
마을에 당산제 등의 공동행사는 없지만 동계를 두 차례나 지낸다. 또한 마을 앞에 선독거리라 부르는 곳에 입석이 있었으나 얼마 전에 주민들이 묻어 버렸다고 한다. 죽림정사 앞에 2001년에 세운 박찬규의 공덕비가 있다.
호치 마을 뒤 청계북초등학교 뒷산에 고인돌이 4개 있다. 문화유적분포도에는 11개의 고인돌이 있었다고 하나 각종 공사로 파괴되거나 묻힌 것이다. 4개의 고인돌 중에서 제일 큰 것은 2미터 60 * 2미터 10 의 크기다. 또한 초등학교 옆에 북초등학교를 세울 때 공을 세운 공적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