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안2리 남안동 - 기러기가 날아가는 형국의 마을
- 작성일
- 2016.07.26 16:23
- 등록자
- 문OO
-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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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안동은 청천리 태봉 마을에서 광목간 도로를 건너 자리하고 있는 남안2리의 마을이다. 남안2리는 검정뫼와 아래호치 남안동 마을로 이루어졌다. 마을의 형세가 남쪽으로 날아가는 기러기와 같다 하여 南雁이라 칭하였으나 일제강점기 때 현재의 이름인 南安으로 바뀌어 졌다. 기러기 형국인 이 마을을 중심으로 해서 제비형국의 연소동, 까치 형국의 작천 등의 마을이 새[鳥]의 형국을 하고 있다. 예전에는 검정뫼 남안동 웃호치 아래호치 까치내 망뫼 상천동 큰골 작은골 등 9개 마을이 한 행정구역으로 남안 2리에 속했다. 1996년에는 이 마을들이 인구증가로 남안 2리와 3리로 분리되었다.
호치(虎齒) 마을은 지형이 호랑이 이빨의 형국으로 청계북초등학교 주변에 있는 마을이다. 동암마을의 호봉산에서 뻗어 내린 맥이 멈춘 자리이며 초등학교 위를 윗호치라 하여 남안3리 상천동에 속하고 초등학교 아래를 아래호치라 하여 남안2리인 남안동에 속하게 했다. 예전엔 국도1호선이 지나갔던 자리이며 번화했던 곳이어서 주막이 들어섰던 곳이기도 하다.
검정뫼는 태봉천을 가로지르는 남안교를 지나 전주최씨 문중산을 배경으로 자리한 마을이다. 예전에 천석군으로 알려진 강참봉이 살았다. 강참봉의 집이 얼마나 컸던지 본채에서 변소를 갈려면 한참이나 걸어갈 정도였다고 한다. 지금은 그렇게 컸던 집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주민들의 기억 속엔 남아있었다. 특히 강참봉이 주민들에게 덕을 베풀어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세워준 공덕비가 마을에 있었다. 그런데 강참봉의 후손들 중 주민들에게 폐를 끼친 일이 있어 강참봉 스스로 그 공적비를 폐기 시킨 일을 주민들은 기억하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 그 공적비가 있었으나 현재는 어디에 있는지 확인할 수 없다.
이 마을의 역사를 추정할 수 있는 두 아름이 넘는 감나무가 얼마 전까지 있었다. 예전에 강정리나 복용리 구로리에 사는 사람들이 다녔던 검정뫼 앞 구길 옆에 있었는데 그 감나무집엔 대장간과 당골도 겸한 집이었다. 아무리 조사 해봐도 검정뫼란 지명유래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단지 1789년의 자료인 호구총수에 ‘黑洞’이라는 마을이름이 나와 검정뫼와 관련되지 않았는가 추정해볼 수 있다. 마을 뒷산은 비가 오지 않을 때 기우제를 지낼 정도로 신성시 여기는 산이었다.
이 마을에서 위쪽으로 조금가면 남안동이 나온다. 남쪽으로 기러기가 날아가는 형국이다. 마을 형성의 유래는 정확히 전해오고 있지 않지만 400여년 전에 밀양박씨가 처음 입향 하였고 그 후로 무안 박씨가 입향 하였다. 현재는 밀양박씨의 후손은 살고 있지 않지만 곳곳에 밀양박씨의 흔적들이 남아있다. 이 마을의 입향조는 1700년대 후반에 이곳에서 자리 잡은 무안 박씨 박선오(1715-1784. 자-치여)로 추정된다. 마을 이름이 호구총수에는 나오지 않으며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과 1917년의 자료에 南安洞으로 나온다.
이 마을은 소꾸리형으로 겨울엔 따뜻하고 여름엔 시원하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속칭 ‘김이 펄펄 나는 마을’이었다. 부자들이 많이 살아 인근 마을에서 신세를 지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많이 베풀기도 했던 마을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역전되었다. 오히려 이 마을 주민들이 주변 마을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을 정도이다. 한국전쟁 같은 전란에도 주민들의 피해가 하나도 없었던 마을이다. 주민들이 온순하고 협조적이어서 화목한 마을을 이루고 있다.
강참봉이라는 천석군이 살았다
남안동에서 검정뫼로 가는 길목엔 송장바위라는 큰 바위가 전주최씨 문중산에 있다. 예로부터 그 바위가 보이면 마을에 큰 피해가 있다 해서 바위 주변의 수풀은 베어내지 못하게 했다. 특히 현재의 마을회관 자리에 배암장이라는 造山이 있었다. 마을에서 송장바위가 안보이게 하려는 조치로 만들었던 산이며 얼마 전까지 있었으나 현재는 없다. 조산에는 이름처럼 뱀들도 많이 있었다. 그렇게 신성시 여겼던 송장바위는 현재 생활 쓰레기로 덮여있으며 관리가 되지 않고 있다. 주변에는 문턱바위 뫼똥바위 등이 있다.
마을 두 군데에 두 개의 고인돌이 있다. 하나는 남안동에서 상천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주변인 영골에 있고 또 하나는 남안동에서 연소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에 있다. 영골에 있는 고인돌은 2미터 90 * 1미터 70의 크기다.
남안동 마을 입구에 밀양박씨 열부각이 있다. 일로 박창표씨 누님의 비로 잘 알려진 비는 1988년에 세워졌다. 또한 마을 뒤에 밀양박씨재각이 있는데 현판도 없고 기둥과 마루가 썩어갈 뿐 아니라 마당에 잡초가 우거져 곧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재각이었다. 그래도 주민들은 예전에는 상당히 크고 규모가 있는 재각이라고 했다. 실지로 정면 4칸 측면 2칸 팔작지붕의 규모였다.
재각 옆에 밀양박씨 문중묘가 있는데 그 묘 중 하나에 朴公麥穗哭碑文 이라 쓰여진 특이한 비가 하나 있다. ‘麥穗’라는 말은 은나라의 신하였던 기자가, 은이 망한 후, 周나라 때에 은나라의 폐허를 보고 지었다는 시에서 나온 말로 亡國의 비탄과 亡國의 자취를 나타내는 말이다. 하지만 이 비문의 내용은 가난한 집안에서도 법도를 지켜온 이야기다. 즉 밀양 박공 주래의 집이 무척 가난하였는데 주래의 어머니가 보리이삭을 주어 연명을 하면서도 집안의 법도를 잃지 않았다. 후일 아들은 보리이삭만 보면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눈물을 흘렸다. 이런 사실을 안 손자 지수가 1926년에 아버지의 이러한 사실을 비문으로 남겨 후일 교훈을 삼고자 세운 비다.
마을유래지에는 주민들의 단합을 위해 1880년에 결성된 동계가 운영되고 있다고 했는데 이번에 확인하였다. 또한 자료에는 진터가 있었다는 청림 마을과 칠성동 마을이 남안동 마을 주변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주민들은 모르고 있었다. 마을 앞에 逆으로 흐르고 있는 태봉천은 현재는 좁은 수로지만 예전에는 마협봉의 큰 줄기에서 물이 흘러내렸기 때문에 상당히 큰 하천이었다. 이 마을의 샘물은 수질검사에서 최고등급을 받았던 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