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면 구로2리 관동 마을 - 관아 터가 아닌 벼슬아치가 살았던 마을
- 작성일
- 2016.07.26 14:16
- 등록자
- 문OO
- 조회수
- 1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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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슬아치가 살았던 마을
관동은 구로2리에 속한 마을로 원래 고성이씨 김씨 함씨 등 여러 성씨들이 살았으나 현재는 나주 정씨의 집성촌이 되었다. 이 마을의 입향조는 정수삼(자-자오, 호-경암, 1823-1889)이다. 족보를 보면 ‘옆 마을인 구로에서 살다가 주변 환경이 수려하고 군자가 가히 살만한 곳이라 여겨 이 마을에 들어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마을 입구에 있는 경암처사 유허비에는 1868년에 들어왔다고 표기되어 있다. 공은 박학다식하여 모르는 것이 없어 주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한다.
그의 묘는 삼향면 지산리의 이른바 돌마산(마장)이라 부르는 곳에 있는데 후손들이 이장하려고 묘를 파보니 그곳에서 杜思忠이라는 명패가 나왔다고 한다. 두사충은 명나라 장수로 임진왜란 때 明軍의 선봉장을 했던 사람인데 왜란이 끝나도 돌아가지 않고 귀화하여 대구에서 산 사람이다. 그는 풍수지리에 밝아 전국의 산을 돌아다니며 각 명당자리에다 자기의 이름을 새긴 명패를 묻었다고 한다. 그 명당 중의 하나가 이 마을의 입향조가 묻혔던 자리이다. 지금도 후손이 그 명패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관동이란 마을이름은 마을유래지에는 관아 터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나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마을의 위치상 관아가 들어설 자리가 아니고 무안역사상 청계면에 관아가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또한 관아가 있었다면 관련된 지명이 있거나 송덕비 등이 있었을텐데 이러한 지명이나 흔적들이 없다. 남아있는 지명으로는 활을 쏘았다는 사장등과 사또자리 정도인데 그것을 가지고 관아가 있었다고 하는 건 지나친 비약이다. 사또자리는 예전에 주막이 있던 자리로 이곳에서 사또가 묵어갔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문헌을 살펴보면 마을 이름이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나오지 않고 1912년의 조선면리동일람에는 官洞이라 표기했다. 이렇게 봤을 때 벼슬아치가 살았다는 곳이 아닌가 여겨진다. 나주정씨가 들어오기 전에 고성이씨 중 진사시험에 합격한 사람이 나왔다는 것을 보았을 때 또한 마을의 주산인 갈마봉이 부사산이라 일컬어지는 것을 봤을 때 館洞보다는 官洞의 의미가 맞는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지금의 館洞 표기는 1917년의 자료부터 나온다.
많은 인물이 배출된 마을
이 마을은 부사산 또는 상곡봉이라 부르는 갈마봉을 주산으로 하고 있다. 좌로는 동산이 있으며 우로는 가란봉, 그리고 마을 앞으로는 청계만이 펼쳐져 있다. 동산에서 13기의 고인돌을 확인했다. 주민들이 동산 바우라고도 부르는 고인돌은 갈마봉에서 동산으로 내려오는 줄기에 많이 있었으나 밭을 개간하면서 깨버리거나 가져가버려 지금은 동산에만 남아있다. 대체로 고인돌의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큰 것은 길이가 4미터 50이 넘기도 한다. 또한 주변에서 돌칼 돌도끼 등이 발견됐다고 기록되었으나 주민들은 몰랐다. 또한 고인돌이 있는 이곳을 부섬이라고도 부른다. 부섬이란 깔따구를 부었다는데서 유래되는 말이다.
마을에 두 기의 선돌이 있다. 마을회관 앞에 있는 선돌은 예전 아름드리가 넘는 당산나무가 있었던 자리다. 그곳에서 주민들은 제상을 차리고 당제를 모시기도 하였으나 70여년 전에 태풍이 불면서 넘어져 죽고 난 뒤에는 당산제를 지내지 안했다. 하지만 그 자리에 선돌을 세우고 마을 입구에도 선돌을 세워 마을의 안녕과 농사의 풍년을 기원했다.
마을 입구의 선돌에는 신사년 10월이라고 각이 되어있다. 신사년(1941년)은 커다란 태풍이 불었던 해다. 포구가 있는 복길에서는 모든 배들이 전부 파손되었거나 떠내려갔고 마을에서는 당산나무가 뽑히고 피해가 극심했다. 선돌은 이런 자연의 폐해를 줄여보고자 세운 액막이다.
이 마을에는 마을 단위로는 드물게 인물이 많이 배출되었다. 같은 동족 마을인 구로동 마을이 경제에 힘썼다고 한다면 이 마을은 교육에 힘써 두 사람의 면장과 전남병무청장 제주 항만청장 그리고 2명의 사법고시 합격자 등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또한 서울대학교 출신자도 5-6명이나 된다. 이처럼 많은 인재를 배출할 수 있었던 것은 선조들의 가르침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에도 명치대학을 다니고 5명이나 목포상고를 다닐 정도로 교육열이 높았다. 이러다 보니 주민들이 ‘자손들을 부처별로 진출시켜서 국가 운영에 큰 역할을 하자’는 욕심을 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높은 교육열이 반드시 좋은 것만도 아니었다. 한국전쟁을 만나자 좌우익의 극심한 대립을 가져왔고 그로인한 주민들의 피해가 상당하였기 때문이다.
마을에 아픈 일도 있었다. 오래 전에 주민들이 마을 앞 대섬 주변에서 굴을 채취하다가 배가 뒤집혀 많은 사람들이 참변을 당한 일이 있었다. 그 이후로는 주민들이 기름진 청계만 어장을 외면해 바다에 나가 수산물을 채취하는 것을 싫어했다.
몰무덤 잔등이라 부르는 곳이 마을에서 벽해동으로 넘어가는 능선에 있다. 또한 가란봉 밑에 설욱이라는 지명이 있는데 이곳에는 아름드리의 소나무가 많이 있었다. 오래 전에 솔잎 혹파리병이 널리 퍼지자 예방 차원에서 마을에서 소나무들을 베어버렸다. 후에 소나무 베어낼 때 주도적으로 나섰던 마을 이장이 변을 당하자 주민들은 소나무를 베어버렸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병목아지의 유래
갈마봉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옛날 자손들이 없던 부인들이 이 바위에서 기도하면 자손을 얻는다고 하여 많은 부인들이 찾아왔다고 한다. 남자의 생식기 모습이며 이 바위에서 기도를 하고 물을 마시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이 바위에서 나오는 물은 태산 붕알 치료에 즉효였다고 한다. 태산 붕알이란 고환이 커진 것을 말한다. 하지만 이곳의 물은 솜으로 찍어 바를 수 있을 정도로 조금밖에 나지 않는다.
코제이 라는 지명이 있다. 마을 앞 바닷가에 있는데 오래 전에 러시아 선원이 그곳에서 쉬어간이 일이 있었다고 한다. 그때 봤던 러시아인의 커다란 코를 보고 주민들이 붙인 이름이다. 그곳에서 잔등을 넘으면 갈룡동이 나온다. 주변에는 묘가 많이 있다. 그 외에 선창터 묘골 망불재 간대정 수랑골 병목아지 등이 있다.
병목아지(병목재)는 마을에서 상마리로 넘어가는 길목인데 구로리 1번지에 해당하는 곳으로 병따개에 해당하는 고인돌 1기가 있다. 상마리 주민들이 새마을 사업을 하면서 이 돌을 건드렸다. 그 때부터 마을 주민들이 이유를 알 수 없는 피해를 봤다고 한다. 즉 젊은 사람들이 술과 관련해서 비명횡사하는 사건들이 많이 발생한 것이다.
주민들은 ‘병목재의 큰 돌이 술병을 막고 있었는데 병의 뚜껑을 열어 버리니 마치 술병이 마을을 향해서 흘러넘치는 형국이라 주민들이 술로 피해를 본다’고 생각했다. 해서 주민들이 병목재의 돌을 제 위치로 옮겨 놓았더니 그 후로부터는 궂은일들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주민들 사이에 이런 노래도 전해온다.
병목아지에서 병을 갖다가
수랑거리에서 술을 받아서
복개봉에서 복개를 가져다
먹어지배미에서 술을 먹었다.
남아있는 지명으로 각골 대퍼리, 말배미, 바람재 복개동, 등재, 맷골, 방죽골, 사곡봉, 사구배미, 서당터, 선독거리, 앞샘, 역짐모시, 절골봉, 점등, 정답, 한새바우 등이 있다. 사장등이라 부르는 곳에 1995년에 폐교된 구남분교가 있으며 1978년에 세운 구남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