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면 구로1리 구로동 마을 - 청계만의 황금어장을 안고 있는 마을
- 작성일
- 2016.07.26 14:03
- 등록자
- 문OO
- 조회수
-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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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정씨의 집성촌 마을
청계만의 비옥한 개펄을 앞에 두고 자리 잡은 구로동은 청계면소재지에서 4㎞ 정도 떨어진 바닷가에 위치한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을 주는 마을이다. 행정구역명으로는 청계면 구로1리 구로동 마을이다. 이곳에는 80호가 넘는 세대가 거주하고 있는데 이들 중 대부분이 나주 정씨일 만큼 나주 정씨의 자작일촌이다.
구로리의 마을 이름을 확인하기 위해서 1789년에 발간된 호구총수(戶口總數)를 살펴보니 찾을 수가 없었다. 대신 벽해동은 있었다. 이어 1914년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정리된 문건을 보니 벽해동은 없었고 구로동과 관동이 있었다. 이로 볼 때 ‘구로리’라는 마을명은 근대에 형성된 것이 아닌가 한다.
벽해동은 현재의 마을 터에서 동쪽으로 올라간 상곡봉(갈마봉이라고도 함)의 한 골짜기에 있다. 현재는 민가가 한 채도 없고 나주 정씨의 묘들이 자리 잡고 있는데 이곳에서 처음 마을이 형성되어 차츰 아래로 옮겨져 현재의 터로 정착되었으리라 짐작된다.
처음 이 마을이 형성될 때에는 나주 오씨, 전주 이씨, 나주 정씨 등이 살았는데 나주 정씨를 제외한 타성들은 현재 거의 없다. 나주 정씨의 입향조는 정립(자-사현, 호-경제. 1601-1639)이다. 정립은 병자호란의 난리를 맞이하여 임금이 한양을 떠날 때 식음을 전폐하고 신하의 도리를 다 하지 못했다하여 근신하였다. 그리고 곧 이어 의병을 모아 임금이 계신 곳을 찾아갔는데 이때 화의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벼슬을 버리고 이곳으로 내려와 세상과 인연을 끊고 갈마산에 들어가 벽해상에 집을 짓고 살았다고 한다.
이후 정립이 죽자 나라에서는 경흥부사를 제수하니 주위 사람들은 갈마산을 부사(府使)산이라 이름 하였고, 그 마을을 벽해(碧海 - 비가동이라고도 부름)동이라 불렀다 한다. 후일 규장각의 직제학을 지낸 민경호는 정립공의 묘비에
‘벽해(碧海) 물은 상전(桑田)으로 변하지 않고
부사(府使) 산 빛 끊임없이 푸르도다
의(義)를 중히 여기어 중화를 받들고
정성은 나라에 간절하도다
일을 마치지 못하고
필마로 고향에 돌아와 39 성상을 마감 하도다’ 라고 썼다.
일제 강점기 때 龜老에서 九老로 변해
후일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 ‘九老’라는 지명은 옛날부터 90세 이상의 노인들이 매년 9명 이상이 살아가는 장수마을이라 해서 구로동이라 했다 한다. 그러나 주민의 이야기로는 원래 ‘龜老’였는데 일제겅점기 때 행정기관에서 ‘구(龜)’자를 쓰기가 어려워 ‘구(九)’로 표기했다 한다. 어쨌든 ‘龜’자든 ‘九’자든 장수마을을 뜻하는 말이어서 마을의 주변 환경이 살기 좋음을 나타내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마을의 화목함을 알려주는 것 중에 하나가 향우회이다. 이 지역에서는 드물게 마을 향우회가 서울에서 열리는데 그날이 되면 마을에서도 많은 사람이 올라가 모임에 참여해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며 마을의 발전을 위해 의견을 모은다.
특히 이 마을은 6,25를 전후해서 지금까지 주민들이 비명횡사를 당한다거나 궂은 일을 당한 적이 별로 없는 사실을 주민들은 마을의 자랑으로 여기고 있다. 마을 앞에는 1962년에 바다 물길을 막은 530미터 길이의 제방이 있다. 이 간척지는 3년여 동안 주민들의 울력으로 이루어낸 것인데 농토가 적은 마을에 상당한 경제적 이득을 가져다 주었다.
이 마을에는 노인회나 부녀회, 영농계 말고도 1930년대에 만들어져 지금까지 내려오는 동계(마을 공동으로 굴 양식장을 운영하여 수익금으로 마을기금조성)가 있고, 주민들의 자녀가 대학에 들어갈 때 장학금을 주는 축산장학회, 그리고 1965년에 설립된 어촌계가 있다. 영농자금을 활용해 주민들의 복지를 위해 어촌계를 설립했다는 정균영옹은 이 어촌계가 청계만에서 도대, 강정, 관동을 포함한 상당히 큰 계였다고 한다.
지금은 창포만이 막히고 골프장 때문에 청계만이 오염되어 전과 같이 미생물이 많거나 유속이 빠르지 않아 김 양식 등을 할 수 없어 농외소득이 많이 줄어들었지만 지금도 청계만은 주민들에게 가구당 1,000만원 이상의 소득을 안겨주는 황금어장이라고 한다. 마을 앞 뻘밭 포구에 놓여있는 낙지배들이 40여척이 넘을 만큼 주민들에게 청계만은 천혜의 어장이 되었고 아녀자들이 굴과 바지락 등을 채취하여 올리는 수입이 만만치 않다고 한다. 이러한 수익 때문인지 몰라도 청계면 내에서는 청년들이 고향을 떠나지 않고 가장 많이 남아있는 마을이기도 하다.
이 마을 주변에는 많은 고지명이 남아 있다. 생활자기를 구웠던 점등, 활을 쏘는 곳인 사장등, 청계만 물길의 망을 본다 해서 망불재(망볼재), 사또가 머물렀던 자리라 해서 사또자리, 용이 목이 마른 형국이라는 갈용동(또는 가랑굴) 등이 있다. 마을 입구에 마치 수문장처럼 마을을 지키고 있는 묘가 있다. 비석에는 ‘성균 진사 정수신(자-성용, 호-취백정. 1787-1844)의 묘’라고 써 있는데 5대조 조상으로서 마을의 자랑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진사 당시의 세도는 주변에 쩌렁하게 울려 인근 마을에서 함부로 범접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런 성균진사의 배출로 마을 한가운데에는 솔대미라는 지명이 있다.
동학의 흔적도 있어
이 마을에 금성 나씨 열부비각이 있다. 마을 중앙에 있는 이 비각은 1969년에 건축되었는데 시멘트 구조물이다. 16세에 이 마을 정해창에게 시집온 나씨는 혈육을 갖기도 전에 남편이 불치의 병을 얻었다. 부인은 남편의 병구완을 위해 매일 같이 목욕재개하고 하늘에 남편의 쾌유를 기원하였으나 남편은 끝내 살지 못했다. 남편이 없는 집에는 6살 먹은 시동생과 홀로 된 시어머니가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부인은 절망하지 않고 시동생을 키워 성혼시키고 그의 아들을 양자로 삼아 대를 잇게 하였다. 후일 아들이 양모의 갸륵한 정성을 기리기 위해 세운 열녀각이다.
마을 동쪽 갈마봉 기슭에는 1920년에 지어진 나주 정씨의 재실인 영모재가 있다. 정면 4칸 측면 1,5칸의 팔작지붕이다. 기둥마다 5개의 주련이 있고 안에는 16개의 현판이 걸려있다. 특히 주련의 글씨체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반적인 체가 아닌 독특한 필체의 글이다. 이 영모재에는 후손인 규한의 시가 있다고 면성지에 나오는데 참고로 정리해 본다.
명기를 택하여 길일에 이루었으니
천만의 기상이 강성을 눌렀도다.
이슬에 느끼어 주저하니 풀이 나옴에 가련하고
서리를 밟아 슬픈데 기러기 울음 한스러워라
솔 그늘 울울하고 하늘 날은 저문데
비 기운 어둡고 바다 바람 불어오도다.
춘추로 잔을 올리고 향사(享祀)를 받으니
성심이 있어서 정을 모두 발하도다.
영모재 옆에는 열부은진송씨의적비, 열부전주최씨행적비 그리고 문중 묘 아래에는 낙헌나주정공효행비 백아나주정학진효행비 강사정해준기적비 등이 있다. 또한 벽해동에는 연향재가 있다. 정면 4칸 측면 1,5칸의 팔작지붕으로 삼문이 있다. 1930년대에 지어진 이 재각은 관리가 되지 않아 주련이나 현판은 모두 분실되었다고 한다.
이 마을에서 특기할만한 사실을 채록했다. 그것은 우리나라 근대사에 큰 획을 그었던 동학혁명에 참여하여 의로운 뜻을 부르짖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후퇴하는 동학군에게 이 마을 주민들이 관군 몰래 식량을 주었다는 사실이다. 마을 주민들 사이에 구전으로 전해져 오고 있을 뿐 사실은 확인할 수 없으나 동학의 흔적을 발견한 것 같아 기쁜 마음이다.
마을 중앙 금성나씨 열부비각이 있는 곳을 솔대미라 부른다. 솔대미는 솔대배미의 줄임말로 조선시대 마을 주민 중에 진사 급제자가 있으면 기념으로 조성했던 곳이다. 주인공은 1800년대 초 성균진사에 오른 정수신(자-성용, 호-취백정. 1787 - 1844)이다. 구로중앙교회가 자리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