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면 남성2리 광석 망산 마을 - 한국전쟁 때 피해가 없었던 마을
- 작성일
- 2016.07.26 14:01
- 등록자
- 문OO
-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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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2리 3村의 마을
광석과 망산은 남성2리에 속하는 마을로 똥재(동재)를 사이에 두고 있다. 자료를 통해서 마을 지명의 변화를 보면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일서면 廣石리로 기록되었다. 이어 1912년의 자료엔 일서면 남성동 가양동으로 1917년엔 청계면 남성리 남성동 가양동으로 나온다. 1987년엔 청계면 남성리 남성동 망산 광석이 있었으나 현재는 남성리 남성동 광석 망산 상석촌으로 구분되었다.
남성2리는 광석 망산 새터미로 이루어진 마을로 청계만을 접하여 있다. 광석은 마을 앞에 큰 돌이 있어서 비롯된 지명이다. 광석 마을 앞 해안가에는 주민 8명이 음식상을 놓고 잔치를 하여도 여유가 있을 만큼 큰 돌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오래전에 밭주인이 땅을 많이 차지한다 해서 돌을 깨버리고 쪼개어 버림으로서 지금은 없다. 마을 이름은 이 돌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돌이 깨어지면서 마을에는 불구자들이 많이 나왔고 젊은 사람들이 이유도 없이 우환을 당했다고 한다. 마을유래지에는 ‘마을의 지형이 지하 3미터 아래에 광석이 전반적으로 깔려 있어 넓은 박독이라는 의미에서 廣石이라 칭하게 되었다’고 기록되었다. 마을 뒷산에 사골 연방죽골 등의 지명이 남아 있다.
광석 마을의 입향조는 동복오씨 오수현이다. 동복오씨 주민은 입향조의 아버지가 무안현의 현감으로 부임하면서 식솔들이 고흥에서 청계면 복길리의 텁석골을 거쳐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무안의 입향자료에는 ‘조선 중종 때 동복에서 거주하던 오수현이 살기가 어려워 이곳으로 옮겨와 터를 닦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오씨 족보를 통해 확인하고 싶었으나 할 수 없었다.
광석 마을에는 주변에서 알아주는 샘이 있었다. 큰샘이라 부르는 샘인데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해 인근 마을 주민들에게 소중한 식수로 사용되었다. 마을 뒷산에 1991년에 세운 동복오씨 제각인 서호재가 있다. 정면3칸 측면 1,5칸의 팔작지붕으로 삼문을 갖추고 있다. 서호재 건립공로자를 기록한 현판 1개가 걸려있다.
망산은 청계에서 두 번째로 높은 지대에 위치한 마을로 마을의 주산인 望梅山(순흥안씨 족보의 표기)에서 비롯된 마을 이름이다. 마을유래지에는 ‘마을 뒷산이 웅장하여 산에서 풍겨 나오는 정기로 소원을 성취한다는 뜻에서 마을 이름을 망산이라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입향조는 순흥안씨 안창효(자-여연, 1745-1814)이다. 이어 제주양씨 양광묵이 함평군 학교면 금송리에서 이곳으로 이주했다.
동학유족이 있어
양광묵(자-대숙, 호-해은. 1839-1894.12)은 동학에 가담을 하였던 분인데 관군에게 쫒겨서 이 마을로 들어온 것이다. 양광묵은 이 마을에 살면서도 마을 뒤 남성제 옆 골짜기에 굴을 파고 은신해 있었다. 어머니가 몰래 갖다 준 음식으로 연명하였는데 고막원 전투 때 참여하여 관군에게 붙잡혀서 고막원 잔등(현재 함평천지 휴게소)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현재 청계면 노인회 분회장이신 양성인회장의 고조부이시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새터미 함씨 밭에서 동학 때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두 자루의 칼을 발견했다고 한다. 1960년대에 발견했는데 관리소홀로 물건은 없고 기억만 남아있었다.
남성2리에는 3村이 있다는 말들을 많이 한다. 광석 망산 새터미가 그것이다. 동재(광석 마을에서 볼 때 동쪽에 재가 있다하여 부르는 이름인데 강하게 발음할 때 똥재라 부른다)를 사이에 두고 위에는 망산, 아래는 광석이 자리 잡고 있으며 새터미는 마을 오른쪽에 자리 잡고 있다. 예전에는 많은 사람이 살았던 새터미는 얼마 전까지 사람이 없었으나 근래에 한 가구가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망산 마을 입구에 있는 청계서부교회는 마을 뒤에 있었다가 10여년 전에 현재의 자리로 옮긴 것이다. 마을 중앙에 ‘제주양씨3세효열려(제주양씨효열문)’가 있다. 1940년에 후손들이 세웠으며 정면 3칸 측면 1칸 팔작지붕의 구조이다. 안에는 양광묵 양병순 양재선의 처 강릉함씨의 정려가 3개 있고 6개의 현판이 걸려 있다. 현판은 효자인 양광묵 병순 父子와 열부인 며느리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다.
망산 마을의 제주양씨입향조인 양광묵은 학문 뿐 아니라 효성도 지극하였다. 부친의 병환을 구하기 위해 온갖 정성을 다하였으며 부친의 사후에는 3년 동안 시묘 살이를 했다. 또한 효자 양병순은 해은공 광묵의 아들로 부친의 본을 따라 부모를 지성으로 섬겼다. 모친이 병환에 들 때는 단지를 하며 병구완을 했고 그래도 돌아가시자 얼마나 슬피 울었던지 눈에서 피가 나왔다고 한다. 시묘살이를 할 때는 호랑이가 공을 도왔다고 한다.
열부인 강릉함씨는 해은공 광묵의 손부로 양재선(자-두순, 호-화성. 1880-1944)의 처로 출가한지 몇 해 되지 않아 남편이 병이 들었다. 오랜 투병 끝에 완쾌되었으나 남편은 성불구자(어렸을 땐 개에게 성기를 물려 성불구자가 되었다는 설도 있음. 해서 고자 대감이라 불렀다고 함)가 되었다. 그렇지만 함씨부인은 끝내 남편의 곁을 떠나지 않고 가정을 지키며 양자를 들여 가문을 잇게 하였다.
이장을 비롯한 주민들은 바빠서 마을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무관심 하지만 무안문화유적분포도에 따르면 두 군데의 지석묘군이 있다. 하나는 남성 마을에서 복길리로 향하는 도로를 따라 가다 보면 복길교를 지나 2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고인돌 1기가 놓여 있다. 또한 망산 마을 입구에서 남성 마을 쪽으로 나있는 야산에 고인돌이 무더기로 있는데 묘와 함께 묻혀 있거나 깨져 있어 정확히 셀 수는 없으나 11기가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청계 지역에서 한국전쟁 때 피해가 없는 마을은 광석과 망산 마을 뿐이라고 한다. 망산 마을 뒤에 서당골이 있으며 마을 앞에 있는 산은 각시봉이다. 남아있는 지명으로 개양골과 마을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인 남석골이 있다. 또한 새태미 앞에 있는 샘으로 다리독샘이 있으며 망산 뒤에 있는 골짜기로 사장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