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면 남성1리 남성동 마을 - 순후한 인심과 학문적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마을
- 작성일
- 2016.07.26 13:58
- 등록자
- 문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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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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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학문적 열기를 살리기 위한 마을 이름
남성동은 지금의 자리보다 청계면소재지 쪽인 암탉골에서 시작하였다. 그러다 어떤 연유인지 지금의 자리로 옮기고 암탉골에는 한 가구도 살지 않는다. 남성1리에 속하는 마을로 보살봉을 주산으로 하고 앞에는 서당뫼가 자리 잡고 있다.
남성동이란 마을 이름은 주민들의 면학열기와 관련이 있다. 주민들은 오래 전에 연동에 있는 서당뫼에 서당을 지어놓고 아이들을 가르쳤는데 아이들이 새벽이 되면 모두 일어나 책을 읽었다. 대체로 새벽녘이 올 때, 별이 가장 밝은데 그중에서도 가장 밝은 별의 이름이 북쪽엔 북두성이고 남쪽엔 남두성이다. 이 남두성이 가장 밝을 때인 새벽 2-3시에 마을의 학동들이 일어나서 서당으로 와 책을 읽었던 것이다. 마을에서는 아이들의 이러한 학문적 열기를 살리기 위하여 마을 이름을 남두성에서 ‘두’를 뺀 남성동이라 하였다. 현재도 이 서당터에는 기와조각 등이 많이 발견된다. 그러나 1789년의 자료인 호구총수에는 남성동이란 마을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1912년의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서부터 남성동이란 지명이 나온다.
이 마을의 입향조는 정확히 가리기 어렵다. 마을 회관 앞 표지석에는 ‘일찍이 나주 정씨, 나주 나씨, 전주 최씨, 여산 송씨, 무안 박씨, 장흥 고씨, 달성 배씨, 평택 임씨 등이 主戶를 이루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주민들은 이 중에서 나주 정씨가 최초로 들어왔다고 이야기 한다.
즉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웠던 나주 정씨 정황수가 보살봉 아래의 입안지지(立眼之地 - 서있는 자리에서 보이는 모든 땅을 자기 소유로 할 수 있음, 나라에서 공신에게 주는 특전)로 현재의 남성동 일대를 하사 받아 나주 정씨의 일가를 이루어 살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 사패지로 32정의 땅을 받았다고 한다. 지금도 마을 곳곳에 나주 정씨 소유의 땅이 많으며 마을의 오른쪽인 비살뫼 자락에는 정황수의 묘와 월봉재가 있다.
그러나 입향시조와 성씨자료에 의하면 ‘여산 송씨 송옥명이 나주 금안동에서 세거하다가 갑자사화(1504년)로 인하여 살 곳을 찾아 이 마을에 들어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무안지망집에는 장흥 고씨 고영호(호-雙愧, 1555 - 1617)가 연동에서 태어나 家業을 일으켰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나주정씨 여산송씨 장흥고씨 등 세 성씨가 비슷한 시기에 이 마을에 들어 와 가업을 일으키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百子千孫之地’의 터가 있었다
마을의 주산은 보살봉(菩薩峰)으로 평지에 우뚝 솟은 봉우리이다. 예로부터 평지돌출 산의 기슭에 터를 닦은 마을은 인물이 많이 나오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 마을에서도 6대 문장이 나왔으며 한 집안에서 내리 3대 진사를 배출하기도 하였다. 또한 보살봉은 승달산을 東으로 맞으며 西海諸島를 거느리는 웅대한 기상을 보여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승달산 앞의 목탁에 비교되는 名山으로 소산 - 소살봉으로 변했다가 지금은 다시 보살봉으로 부르고 있다. 특히 보살봉은 가뭄 때 주민들이 올라와 기우제를 지냈으며 변란시에 도대봉의 봉화를 받아 이곳에서도 봉화를 올렸다.
앞산은 서당뫼라 부르는 곳으로 지형이 연잎[蓮葉]의 형상을 하고 있다. 이 산에는 무덤에 석물을 하지 못한다. 연잎의 형상이어서 석물을 하면 연잎이 가라앉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마을과 주변에는 연골, 연등, 연등개, 백련동, 연곡 등 연과 관련된 지명이 많다. 서당뫼의 줄기에 방망치라는 지명이 있다. 마치 야구방망이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이곳에 ‘百子千孫之地’의 터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간척이 된 후로 옛 모습을 잃어버렸다. 방망치 위쪽에 물이 들면 솥뚜껑이고 빠지면 자라목 같다는 소드랑 섬이 있다.
이 마을의 학문적 전통을 보여주는 강학소가 있다. 남성정사로 惺菴 배병구 선생의 정자이다. 성암 선생은 면암 최익현, 송사 기우만의 문하생으로 문장이 뛰어나고 학문에 조예가 깊었다. 그는 충효의 정신을 후세에게 전수하고 나아가 만년에 쉬면서 후손들의 강학을 위해 세운 정사이다. 이 정사가 건립되기 전에는 草堂이 있어 많은 문장과 인재를 배출하였는데 특히 제자 중에 초대 전남지사를 지냈던 이남규를 비롯한 박시배 등 걸출한 인재를 배출한 산실이기도 하다.
이남규 전 지사에 대한 일화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주변 사람들이 한적한 어촌의 복길리 출신인 이남규 지사를 얕보고 그의 학문적 소양을 묻자 성암선생은 이지사가 15세 때 서당에서 백일장 대회를 했을 때 썼던 시구를 보여주었다고 한다. 그 시는 屛風을 소재로 하였는데
花不飄泠 四節紅하고
鳥離生死 千年黙이라
(꽃은 바람에 떨어지지 않고 사계절 내내 붉게 피어있고
새는 생사를 잊어버리고 천년을 고요하게 지내더라)
이 정사는 1946년에 지었는데 지을 때 여러 가지 재미있는 일화가 있었다. 그 중의 하나가 성암공이 8세 때 심은 소나무를 베어 정사의 기둥을 세웠으며, 집안이 가난해 집에서는 죽을 먹었지만 정사를 짓는 인부들에게만은 따뜻한 밥을 지어서 드릴 정도로 정성을 다해 지었다고 한다.
마을에 동학의 흔적이 있었다. 마을 옆 ‘저 너머’라는 곳에 송씨들이 살았는데 이 송씨(신촌 할아버지, 중등양반이라 부르기도 함)들 중 동학 때 접주가 있었다. 이런 이유로 인하여 고막원 전투 이후 동학군이 관군에게 진압되면서 접주가 살았던 이 마을도 관군들에 의해 화재를 당하여 집들이 모두 불타버렸다. 이후 송씨들은 요너머로 이주해 살았다고 한다.
또 한사람 高時運(1854 -1937) 공이 있다. 공은 일제강점기 때 高膏藥이란 유명한 고약을 제조하여 팔기도 했는데 광산구 대촌에서 동학군으로 활동하다 일본군에게잡혀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이후 이곳으로 옮겨와 공부를 해 한의학에 일가를 이루었다. 한의학 뿐만 아니라 조각 그림 등 다방면에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였다. 특히 공이 만든 고약이 종기에 얼마나 잘 들었든지 삼남지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같은 마을의 나종선 공도 침을 잘 놨다. 공의 후손 집에는 공이 사용했던 침통이 남아 있다.
마을 아래에 있는 시여샘(세지)이 있다. 이 샘은 널리 알려진 샘으로 무안의 못샘 - 화설당 샘 - 농공단지 샘 - 상마정 샘 - 그리고 이곳 시여샘으로 연결되는 水脈을 갖고 있다. 이 샘은 얼마나 수량이 풍부한 지 5인치 양수기로 하루 종일 물을 품어 올려도 마르지 않는다. 해서 주변 사람들이 시여샘의 수맥을 찾으려고 주변을 파헤쳤으나 찾지 못했다고 한다. 여름엔 따스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샘이다.
연동은 일제시대 때 골재채취장이었다. 이곳에서 나온 골재는 망운비행장 터 닦이에 사용되었다. 그런데 이 골재의 운반이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좋은 구경거리이기도 하였다. 즉 여러 대의 배에 골재를 싣고 한 척의 기선이 끌고 가는 모습이 신기하게 보였다는 것이다. 이 골재는 서해안 물길을 따라 망운의 비행장 공사장까지 운반되었다.
비살뫼 아래에 1980년에 세워진 나주정씨 재각인 월봉재가 있다. 임란공신 월봉 정황수를 모시는 재각으로 정면 4칸 측면 1,5칸의 팔작지붕으로 삼문이 있다. 6개의 주련이 걸려있으며 안에는 월봉공사실기와 월봉재 창건기를 기록한 두 개의 현판과 1개의 액자가 걸려있다. 암탉골 아래에는 장흥고씨 재각인 청연재가 있다. 정면 3칸 측면 1,5칸의 팔작지붕으로 삼문이 있다. 1988년에 세워진 재각으로 안에는 청원재제실문이라는 1개의 현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