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림 7리 격양동 마을 - 사람들이 선호하는 주거지 마을
- 작성일
- 2016.07.26 13:55
- 등록자
- 문OO
- 조회수
- 7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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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양동은 보살산(주민들은 소살봉 소설봉이라고도 한다) 기슭에 있다. 마을 앞으로는 용개천이 흐르고 있으며 맞은편에 매봉과 안산이 자리하고 있다. 격양동은 전체가 여산송씨 문중산이었다. 처음엔 5-6가구 송씨들이 터를 잡고 살았으나 주변 마을에서 한두 사람이 건너오면서 마을이 형성된 것이다. 이 마을이 행정적으로 독립한 것은 2011년이었다.
도림리의 분구를 살펴보면 1986년에는 선돌과 연곡 2개의 마을이었으나 이후 1987년의 자료에는 도림리가 선돌 연곡 백련동 등 3개 마을로 나눠진다. 이어 1993년 도림1리를 1. 4리로, 도림3리를 3. 5리로, 나누고 다시 2000년에 도림1리를 1. 6리로 분리하고 2011년에는 2리를 2, 7리로 분리했다. 현재는 청림 연곡 백련동 월암 문화촌 입석 격양동 등 7개 마을로 이루어 졌다.
예전부터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도림리는 승달산에서 도를 닦는 12명의 상좌가 보살봉 앞에 칠성단을 만들어 놓고 촛불을 켜고 예불을 올리고 있다’는 형국으로 알려졌다. 12 상좌는 연곡을 포함하여 도림동 청림 양지촌 백운정 대흥동 월암 격양동 칠성동 입석 유점동 평버들 등 도림리에 속한 12개 마을 이름을 나타낸다. 칠성단은 7개의 고인돌을 갖고 있는 칠성동을 말하며 두 개의 촛불은 승달산의 촛대봉과 보살산 아래 남성동의 장흥 고씨들 산의 촛대봉이다.
도림1리의 일부를 포함한 도림4리와 도림7리는 대부분 여산송씨의 터였다. 매봉과 안산 그리고 보살봉의 상당부분도 송씨들 소유의 땅이었다. 이렇게 송씨 소유의 땅이 많은 것은 정유재란 때 나라를 위해서 몸을 바친 송 박(호-愛松) 송 욱(호-愛筠) 등 두 형제에게 나라에서 내린 사패지였기 때문이다. 매봉 기슭에 송씨들의 제실 겸 납골당이 자리하고 있다.
이 마을은 삼거리와 격양동으로 이루어졌다. 삼거리는 상마삼거리를 말하며 주유소가 들어서 있다. 이 마을 입향조는 여산송씨 송태섭이다. 약 100여년 전부터 송씨들이 5-6가구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는데 목포대학이 들어오고 여러 계층의 사람이 들어오면서 이제는 복합성씨의 마을이 되었다. 이어 코아빌라를 선두로 백두그린빌 그리고 별장아트가 들어오고 운전학원이 문을 열면서 유동인구를 포함한 많은 세대가 들어섰다.
이 마을의 이름은 격양동이다. 조선시대 표기는 擊壤洞으로 했다가 일제강점기부터는 格良洞으로 표기되었다. 지명의 유래는 아는 사람이 없어 정리하기 어렵다. 한때 이 마을은 재앙동으로 부르기도 했다. 물이 없고 안 좋은 일이 겹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실지로 초기에는 어렵고 가난한 사람들만 살았다. 이 마을에 살면서도 갑작스러운 사고로 홀로 되기도 일찍 죽기도 하였다. 또한 아파트를 지었지만 1년 넘게 분양이 되지도 않아 굉장히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해서 주민들이 격양동을 부르면서 대양동이라 하다가 재앙동으로까지 부르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사정이 다르다. 교통이 좋고 공기가 좋을 뿐 아니라 편의시설을 가까이 하고 있어 사람들이 선호하는 주거지가 되었다. 여기에 살고 있는 많은 주민들이 목포나 무안으로 출퇴근하는 사람들이다.
한국전쟁 때 보살봉과 매봉 그리고 승달산에서 봉화가 올랐다. 좌익 활동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 연락을 취하는 수단이었지만 도림리는 다른 지역보다 좌익활동이 활발하였다. 특히 좌익활동에 연루되어 처형당한 사람도 많았다. 이 마을에서도 운전학원 골짜기에서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