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림6리 입석 마을 - 현감의 선정비가 선돌처럼 세워진마을
- 작성일
- 2016.07.26 13:53
- 등록자
- 문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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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석은 도림6리에 해당하는 마을로 선돌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입석이란 지명이 처음 나온 것은 일제강점기인 소화 3년(1928년)부터이다. 현재 목포대학교 정문 옆에는 승달산 자락의 안골과 물맞이고랑에서 내려오는 하천이 있는데 일제강점기 때 그곳으로 국도 1호선이 지나면서 다리를 놓게 되었다. 그때 붙여진 이름이 입석교이다. 그 이후 입석교 주변에 마을이 형성되었는데 그때부터 입석마을 또는 선돌 마을로 불려진다.
도림리의 분구를 살펴보면 1986년에는 선돌과 연곡 2개의 마을이었으나 이후 1987년의 자료에는 도림리가 선돌 연곡 백련동 등 3개 마을로 나눠진다. 이어 1993년 도림1리를 1. 4리로, 도림3리를 3. 5리로, 나누고 다시 2000년에 도림1리를 1. 6리로 분리하고 2011년에는 2리를 2, 7리로 분리했다. 현재는 청림 연곡 백련동 월암 문화촌 입석 격양동 등 7개 마을로 이루어 졌다.
마을에 선돌이 언제부터 서 있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하지만 선돌에 관련된 유래는 네 가지 설이 전해져 온다. 하나는 한양에서 8개의 바위가 남으로 내려오다 칠성동에서 7개가 멈추고 나머지 하나가 현재의 자리에 멈췄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마을이 음기가 강해 비보를 위해 마을 입구에 세웠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어떤 장사가 성을 쌓으러 가다가 다 쌓았다는 말을 듣고는 가져가던 돌을 버렸다는 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아기를 못 낳는 여자가 점을 치러 와서 어떻게 하면 아이를 낳을 수 있는지 묻자 점쟁이는 오늘 정성을 드리고 집으로 돌아갈 때 어떤 일이 있어도 뒤를 돌아봐서는 안 된다는 약속을 지키면 원하는 아이를 낳을 수 있다고 했는데 여자는 집으로 가다가 갑자기 부르는 소리에 그만 자기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게 되면서 돌아보지 말라는 약속을 어겨 바위로 변했다는 설이다.
원래 도림1리에는 승달산에서 내려오는 개울을 사이에 두고 백운정과 도림동 대흥동 그리고 양촌과 청림 등 다섯 마을이 있었으나 개울 건너 백운정과 도림동 그리고 대흥동 일부는 목포대학교 부지로 들어가고 지금은 陽村(陽之村) 과 靑林(淸林)으로 이루어졌다. 白雲亭과 청림은 무안박씨들이 주로 살았고 양촌과 대흥동은 청주한씨들 그리고 도림촌은 전주이씨들이 주로 살았다. 또한 이 마을은 상대미 천치골 사장골 사직골 등 네 개의 골짜기로 이루어졌다고도 볼 수 있다.
처음 들어온 성씨는 국씨들이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지금은 한 가구도 없고 냉골이라 부르는 곳에 국씨들 묘만 남아있다. 이곳에 살았던 국씨들의 후손은 현재 망운면 장재동에 살고 있다. 후에 청주한씨 韓番仁(자-기옥, 호-둔암)이 들어와 입향조가 되었다. 공은 장흥군 장동면 북교리에서 세거하다가 임진왜란에 피난을 와 이곳 도림리 유점동에 자리를 잡았다. 이후 그는 영달을 꿈꾸지 않았으며 후손들의 교육에 힘쓰며 자연과 벗 삼아 일생을 보냈다.
이후 들어온 성씨가 전주이씨와 무안박씨다. 현재는 외부인이 더 많은 복합성씨의 마을이 되었다. 주민들은 원주민을 중심으로 부녀회를 조직하여 상부상조하고 근면한 생활을 하며 화목한 마을 생활을 하고 있다.
입석마을은 승달산의 맥을 이어받은 사자봉을 주산으로 하고 있으며 마을 앞으로는 국도1호선이 지나고 있다. 청계면의 중심 마을로 월암 마을의 일부를 포함하고 있으며 우체국 파출소 등과 버스 정류장 그리고 두 개의 교회를 포함하고 있다. 한때 물이 좋아 이 지역 막걸리의 대명사가 되었던 청계막걸리의 주조장도 이 마을에 있었다. 초기에 막걸리 양조를 시작했던 사람은 돈과 명성을 모두 얻었다. 하지만 두 번째로 시도했던 사람은 그 두 가지를 모두 잃었다. 현재 마을에서 경로당으로 사용하고 있는 집은 원래 청계면 노인정이었다.
선돌은 선정비였다
입석은 칠성바우 미륵바우라고도 불려지는데 다세대 주택 옆에 붙어 있다. 예전에는 주택가 길 옆에 있었는데 주변이 정리되면서 그 자리에 다세대 주택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땅을 돋아 다세대 주택을 지은 관계로 선돌이 깊숙이 묻혀 있지만 위에는 스텐레스로 보호막까지 쳤다. 선돌의 길이는 3미터 50센티미터 폭은 1미터 60센티미터로 사람 모양을 하고 있다. 예전에는 선돌 앞에 상석이 있었고 주변에는 커다란 동백나무가 있었다 하나 현재 상석은 없고 어린 동백나무만 자라고 있을 뿐이다. 물론 제사도 지내지 않고 있다.
들어가서 살펴보니 앞면에 희미하게 글자가 조각되어 있다. ‘縣監金侯( )省 恤民善政碑 ( )丑 六月’라 쓰였다. 자료를 찾아 확인해보니 1684년 7월 무안현에 부임해 1688년 2월까지 4년 동안 근무했던 김일성 현감의 선정비였다. 이 입석은 고인돌이나 거석숭배사상에서 나온 돌이 아니라 원래 선정비였던 것이다.
도림리 일대는 모래 자갈 밭이어서 농사 짓기가 매우 어려웠다. 해서 예전에는 어렵게 살았으나 일제강점기 때 국도1호선이 지나가고 1981년 목포대학교가 들어오면서 경제적인 여유를 갖게 되었다. 목포대학교 학군단 옆 대암동이라 부르는 곳엔 고인돌이 많이 있었다.
한국전쟁 때는 이 마을이 좌우의 대립으로 엄청난 소용돌이에 휩싸여야 했다. 이웃 마을에 좌익 사상에 물든 사람이 있어서 주민들은 낮에는 태극기를 달고 저녁에는 인공기를 달 정도로 사상의 혼란을 가져왔으며 살기 위한 치열한 생존의 몸부림이 펼쳐졌던 곳이기도 하다. 이러한 분쟁의 중심지에 있던 청계파출소는 당시에 대나무로 감싸듯이 보호해야 했다.
파출소 앞에 3기의 묘를 안고 있는 묘역이 있다. 주민들이 부르기를 압해도 김씨 땅이라 일컬어지는 이 묘역은 5기의 고인돌이 놓여 있다. 예전에는 10기의 고인돌이 있었다 하나 지금은 5기만 확인되고 있다. 그중에서도 2기는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데 3기는 고인돌의 일부가 땅에 묻혀있다. 그중 가장 큰 고인돌의 크기는 길이가 3미터 80 폭이 2미터 90으로 대형이다. 얼마 전까지 묘역 앞에는 수백 년이 됐음직한 소나무가 있어 역사와 연륜을 자랑하였으나 현재는 없다.
목포대 정문에서 선돌로 오는 소로 옆에 1991년에 세운 효자무안박공봉규기행비와 효부달성배씨행적비 등 두 기의 비가 서 있었으나 현재는 없다. 마을 중앙에 무안박씨 제각인 매월당이 있다. 이 제각은 애한정 박익경의 증손인 매월당 박문용을 모신 제각으로 정면 3칸의 팔작지붕으로 1993년에 중수하였다. 재각의 문이 잠겨 있어 재각 안의 상황은 볼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