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림5리 문화촌 마을 - 문화를 가꾸는 마을
- 작성일
- 2016.07.26 13:48
- 등록자
- 문OO
-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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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파일(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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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촌 마을은 목포대학교가 도림리에 들어오고 인구가 증가하면서 백련동 마을에서 분가했다. 해당 지역은 목포대학교 사거리에서 복길 쪽으로 연곡천을 기준으로 右로는 연곡마을이 左로는 백련동과 문화촌으로 나누어진다. 이어 백련동과 문화촌은 푸른솔 유치원 앞 다리에서 다시 나누어진다. 백련동은 복길간척으로 형성된 간척지이지만 문화촌은 밭으로 활용했던 농지였다. 복길간척지는 삼향면 왕산리 금동 마을과 청계면 복길리 복길 마을을 잇는 제방으로 1986년에 완공되었다.
문화촌이란 지명은 이 마을이 백련동에서 분리되면서 주민들이 모인 총회에서 나온 이름이다. 마을에 학문기관이 들어왔으니 그에 걸맞는 이름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주민들의 바람이 문화촌이란 이름으로 나타난 것이다.
도림리의 분구를 살펴보면 1986년에는 선돌과 연곡 2개의 마을이었으나 이후 1987년의 자료에는 도림리가 선돌 연곡 백련동 등 3개 마을로 나눠진다. 이어 1993년 도림1리를 1. 4리로, 도림3리를 3. 5리로, 나누고 다시 2000년에 도림1리를 1. 6리로 분리하고 2011년에는 2리를 2, 7리로 분리했다. 현재는 청림 연곡 백련동 월암 문화촌 입석 격양동 등 7개 마을로 이루어 졌다.
예전부터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도림리는 승달산에서 도를 닦는 12명의 상좌가 보살봉 앞에 칠성단을 만들어 놓고 촛불을 켜고 예불을 올리고 있다’는 형국으로 알려졌다. 12 상좌는 연곡을 포함하여 도림동 청림 양지촌 백운정 대흥동 월암 격양동 칠성동 입석 유점동 평버들 등 도림리에 속한 12개 마을 이름을 나타낸다. 칠성단은 7개의 고인돌을 갖고 있는 칠성동을 말하며 두 개의 촛불은 승달산의 촛대봉과 보살산 아래 남성동의 장흥 고씨들 산의 촛대봉이다.
백련동과 문화촌으로 분리되면서 당시 문화촌 터에는 12가구의 취락개선 주택건설이 예정되어 있었다. 이어 아파트가 들어서고 청계제일교회에서 분가한 중앙교회와 원불교가 들어섰다. 또한 4차선의 도로가 개설되고 식당가가 형성되면서 나름대로의 활력을 찾고 있다.
원래 이 마을에는 딴산이라 부르는 석산이 있었다. 목포대 정문 앞 사거리에 있는 산으로 대부분이 돌로 이루어진 산으로 승달산과 떨어져 있다 해서 딴산으로 부르기도 한다. 당국에서는 도림리의 이주민을 수용할 토지를 만들면서 이 산의 돌을 활용한 것이다. 지금은 우람했던 석산의 모습은 찾을 길 없고 평이한 평지로 변해있다.
이 석산과 관련하여 오래 전부터 ‘道林’에 대해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어느날 풍수에 능한 사람이 이 마을에서 승달산을 바라보고 노스님 셋이 경을 읽고 있는 노승예불형의 吉地를 보았다. 둘러보니 인근의 남성리 소살봉은 보살산이고 예전 목대 앞에 있었던 석산은 칠성산의 형국이었다. 해서 보살 할멈이 격앙동에서 밥을 지어 칠성산에다 바쳐 놓으면 승달산의 스님이 공양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온 것이다. 또한 승달산의 12봉우리가 12제자가 되어 스님에게 인사를 하는 형국이어서 때가 되면 선비들이 많이 배출될 수 있는 곳이라 하여 도림이라 했다는 것이다.
어쨌든 1981년 목포에 있었던 목포대학교가 이 마을로 이전한 것을 보면 선인들의 예견지명의 지혜가 새삼스럽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