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림4리 월암 마을 - 여산송씨의 사패지 마을
- 작성일
- 2016.07.26 13:45
- 등록자
- 문OO
- 조회수
- 1013
첨부파일(6)
-
이미지 도림리 월암1.JPG
347 hit/ 2.56 MB
-
이미지 월암2.JPG
279 hit/ 2.98 MB
-
이미지 월암3.JPG
281 hit/ 7.64 MB
-
이미지 월암4.JPG
275 hit/ 10.63 MB
-
이미지 월암5.JPG
267 hit/ 3.34 MB
-
이미지 월암6.JPG
292 hit/ 3.18 MB
道林里는 청계면소재지의 중앙에 위치한다. 뒤에는 무안의 주산인 승달산이 있고 里의 중앙으로 광주 - 목포 간 국도 1호선이 지나고 있다. ‘道林’이란 지명은 선비들이 많이 배출되는 지역이란 의미를 갖고 있으나 주민들 사이에서는 큰 길 가에 숲이 무성하다 하여 도림리라 칭하였다고도 한다. 원래 도림리는 무안군 일서면에 속한 지역이었으나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청림리 양지촌 삼덕리 대흥리 대암동 격양동 일부를 합하여 청계면으로 편입되었다.
1986년에는 선돌 연곡 2개의 마을뿐이었으나 이후 1987년의 자료에는 도림리가 선돌 연곡 백련동 등 3개 마을로 나눠진다. 이어 1993년 도림1리를 1. 4리로 나누고 이어 도림3리를 3. 5리로 분리 했다. 2000년에는 다시 도림1리를 1. 6리로 분리해서 현재는 청림 연곡 백련동 월암 문화촌 입석 격양동 등 7개 마을로 이루어 졌다. 해서 월암이란 지명은 1993년에 처음 나온다.
예전부터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도림리는 승달산에서 도를 닦는 12명의 상좌가 보살봉 앞에 칠성단을 만들어 놓고 촛불을 켜고 예불을 올리고 있다’는 형국이다. 12 상좌는 연곡을 포함하여 도림동 청림 양지촌 백운정 대흥동 월암 격양동 칠성동 입석 유점동 평버들 등 도림리에 속한 12개 마을 이름을 나타낸다. 칠성단은 칠성동을 말하며 두 개의 촛불은 승달산의 촛대봉과 보살산 아래 남성동의 장흥 고씨들 산의 촛대봉이다.
도림4리의 구역을 보면 청계 제일교회에서부터 상마정 삼거리까지 해당되는 부분으로 광-목간 도로의 오른쪽 지역이다. 매봉을 주산으로 하고 있으며 마을 앞에는 보살봉이 자리하고 있다. 신촌 태양열 안산 월암 등 4개 마을을 포함한 상당히 넓은 지역이다. 신촌은 새로 마을이 이뤄진 지역으로 1980년대 중반에 형성되었다. 도림4리에서 제일 위쪽에 위치한다. 태양열 마을은 1983년경에 형성되었는데 당시 태양열은 친환경 주택단지로서 전국적으로 주목을 받을 때 정부 지원을 받아 형성된 마을이다.
안산은 매봉의 줄기로 마을 왼쪽에 자리하고 있는 제일교회 뒤에 있는 산이다. 안산은 대체적으로 마을 앞에 있어서 붙여진 이름인데 특이하게도 이 산은 마을 뒤에 있으면서 마을이름이 되고 있다. 안산은 도림4리의 중심마을이며 안산 기슭에는 현재 새로운 주택단지가 들어서고 있다.
월암은 도림6리에도 일부가 포함되어 있는데 행정구역의 구분이 조금 애매하다. 특히 ‘월암’이라는 지명의 유래가 된 바위나 고인돌이 있어야 될 텐데 주민들에게 아무리 물어봐도 알 수가 없다. 칠성동의 고인돌을 보고 마을 이름을 지었는지 아니면 입석마을의 선돌을 보도 지었는지 확인할 수 없다. 같은 이름의 해제면 유월리 월암이나 일로읍 월암리 월암 마을의 경우에는 마을에 커다란 고인돌이 있다.
도림1리의 일부를 포함한 도림4리와 도림7리는 대부분 여산송씨의 터였다. 매봉과 안산 그리고 보살봉의 상당부분도 송씨들 소유의 땅이었다. 이렇게 송씨 소유의 땅이 많은 것은 정유재란 때 나라를 위해서 몸을 바친 송 박(호-愛松) 송 욱(호-愛筠) 등 두 형제에게 나라에서 내린 사패지였기 때문이다. 매봉 기슭에 송씨들의 재실 겸 납골당이 자리하고 있다.
세장비 뒤에 문중 소유의 땅을 표시했다
조선시대 무안의 여산송씨 문중은 호국정신 뿐 아니라 열부행의 표상이었다. 적과 항쟁하다 죽음은 忠이며 적에게 잡힌 치욕을 씻을 길 없어 유방을 베고 순절한 죽음은 烈이며 적에게 굴하지 아니하고 꾸짖다가 분사한 죽음은 節이며 의려를 모아 세가 궁함에 의롭게 죽은 것은 義이다. 이처럼 一門의 안에서 忠 節 義 烈이 나옴은 드물다 할 것이다.
마을에 한때는 똥산이라 부르기도 했으나 동산이라 부르는 곳이 있다. 예전에 한양 가는 길목에 위치한 이곳은 소나무가 우거져 있었으며 무덤도 한 기가 있어 주민들의 쉼터로 활용되었으나 현재는 소나무 두 그루만 서 있다.
동산에서 조금 내려오면 1922년 임술년에 세워진 여산송씨세장비가 있다. 지금은 주택 속에 있지만 예전에는 한양 가는 길목으로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였던 길이다. 세장비 뒷면에 조금 특이한 문구가 있다. 소산에 20정4반, 응봉에 22정 3반, 상대암에 21정 2반 등의 송씨 문중 소유의 토지 면적이 적혀 있다. 이처럼 세장비에 문중 소유의 토지를 명시한 것은 이례적인 일로 문중의 위상을 과시하는 면도 있으나 토지 분쟁을 없애기 위한 면도 있다.
청계중학교 후정에 한 쌍의 석인이 있다. 송감사의 묘에 있었던 석인이다. 송감사는 여산송씨 족보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인물이나, 상마리 사람들의 의식에 뚜렷이 남아있다. 송감사가 살았다는 죽림지역에는 지금도 밭을 갈 때 쟁기 날을 버릴 정도로 많은 기왓 조각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송감사가 이곳에 살았다는 자료나 기록은 없다. 하지만 불당골로 불리는 곳에 구전으로 전해오는 송감사의 묘라는 큰 봉분이 있었는데 그 묘 앞에 서 있었던 석인 두 기가 예비군 훈련 때 예비군들에 의해서 현재 청계 중학교에 옮겨진 것이다.
공공기관으로는 1952년에 세워진 청계제일교회가 있고 1971년에 세워진 청계중학교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