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림3리 백련동 마을 - 지역교육과 발전을 위해 터를 양보한 마을
- 작성일
- 2016.07.26 13:43
- 등록자
- 문OO
- 조회수
- 8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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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목포대학교가 들어선 자리에는 승달산에서 내려오는 개울을 사이에 두고 백운정과 도림동 대흥동 그리고 양지촌과 청림 등 다섯 마을이 있었다. 1979년 목포대학교 건설이 시작되면서 백운정과 도림동은 목포대학교 부지로 모두 들어가고 陽村(陽之村) 과 靑林은 일부만 들어갔다. 또한 승달산 자락의 상대미 천치골 사장골 사직골 등 네 개의 골짜기도 함께 목포대학교 부지로 들어갔다. 후에 목포대가 확장되면서 평버들과 대흥리가 새로 편입되었다.
백련동은 도림3리에 속한 마을로 목포대학교 건설로 이주하게 된 백운정과 도림동 마을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형성한 마을이다. 후에 청림과 양지촌 일부의 주민과 평버들 대흥리 주민들도 함께 와 살게 되었다. 이때 처음 터를 잡은이가 현재 마을 노인회장을 하고 있는 신현중 공이다. 이어 들어온 성씨들이 전주이씨 김해김씨 무안박씨 평산신씨 등으로 마을이 이루어졌다.
원래 이 마을은 바다였으나 1970년대 청계면 복길리와 삼향면 왕산리 사이에 복길방조제가 들어서면서 간척지가 되었다. 이후 농경지가 조성되어 농사를 짓다가 1979년부터 매립을 시작하여 부지를 만들었고 1981년에 처음 주택이 들어서 마을을 형성한 것이다.
백련동(白蓮洞)이란 지명의 유래는 마을 주변의 지형이 연(蓮)의 모양이고 마을 옆으로 흐르고 있는 개천의 지명이 연동개라고 부른데서 비롯된다. 처음 이주민들이 마을을 형성하고 마을 이름을 정할 때 여러 의견들이 있었다. 하지만 원래 있었던 지명을 참고로 해서 지명을 붙이자는 데 모두 동의해 백련동이라 한 것이다.
보살봉과 서당뫼 아래로 흐르고 있는 하천을 연동개라 하는데 지금은 농개천이라 부르는 큰 개웅이다. 또한 마을 오른쪽에 있는 산을 서당뫼라 하는데 지형이 연잎[蓮葉]의 형상을 하고 있다. 해서 이 산에는 무덤에 석물을 하지 못한다. 연잎의 지형이어서 석물을 하면 연잎이 가라앉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서당뫼 주변에는 연골, 연동, 연동개, 연곡 등 연(蓮)과 관련된 지명이 많다.
예전부터 도림리에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도림리는 승달산에서 도를 닦는 12명의 상좌가 보살봉 앞에 칠성단을 만들어 놓고 촛불을 켜고 예불을 올리고 있다’는 형국이다. 12 상좌는 연곡을 포함하여 도림동 청림 양지촌 백원정 대흥동 월암 격양동 칠성동 입석 유점동 평버들 등 도림리의 12개 마을 이름을 나타낸다. 칠성단은 칠성동을 말하며 두 개의 촛불은 승달산의 촛대봉과 보살산 아래 남성동의 장흥 고씨들 산의 촛대봉이다.
우리 지역에서 도시 계획이 처음으로 이루어진 마을
마을은 보살봉(소살봉이라고도 함)을 주산으로 하고 좌측으로는 놋종골 집각골 가시동이 있으며 오른쪽으로는 서당뫼 또는 안산이라 부르는 산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다. 앞으로는 복길방조제로 형성된 너른 들판이 펼쳐져 있다. 청주한씨의 문중산인 놋종골은 산 정상에 놋종이 묻혀 있다고 전해져 오나 아직 확인하지는 않았다. 예전에는 鍮店洞이라 불렀다.
이 마을은 우리 지역에서 처음으로 도시계획이 이루어져 형성된 마을이다. 도로를 비롯한 각종 편의 시설이 계획적으로 조성되어 주민들의 삶의 질 향상에 도움을 주고 있다. 특히 마을회관은 위치가 좋고 넓어 청계면에서 행사를 할 때면 인근 마을의 주민들이 모두 이곳에 모여서 준비를 하기도 한다. 심지어는 교육을 할 때도 회관을 사용해 마을에서 유상으로 임대해 주기도 한다. 주민들은 부지런하고 근면할 뿐 아니라 성실함으로 부를 이룩한 마을로서 자립심이 강한 마을이다.
한때는 고향에서 쫒겨 나왔다는 의미로 ‘쪽개촌’의 ‘쪽개민’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이런 이름으로 비아냥거릴 때마다 주민들은 마음에 상처를 입었다. 하지만 백련동 주민들의 양보로 우리 지역에 대학이 들어서게 되고 지역이 발전하게 된 것을 이해하게 됨으로써 현재는 오히려 자랑스러워하고 있다.
연동개는 한국전쟁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현장이다. 한국전쟁이 한창일 때 이 개웅에는 수많은 좌익인사들이 죽어 있었다고 한다. 이웃 마을인 청림 마을은 한국전쟁을 전후해서 서남부 지역 남로당의 근거지였다. 이 마을 출신 좌익인사의 영향을 받아서 청계면의 인재들뿐 아니라 인근 지역의 사람들도 사회주의 사상에 물든 것이다. 주민들은 낮에는 태극기를 달고 저녁에는 인공기를 달 정도로 사상의 혼란을 가져왔으며 살기 위한 치열한 생존의 몸부림이 펼쳐졌던 곳이기도 하다. 지금도 주민들은 이곳을 지날 때면 몸이 오싹해진다고 한다.
이 마을을 포함하여 주변에 두 개의 교회와 천주교 성당이 있다. 각각 교파를 달리하는 청계중앙교회와 도림교회가 그것이다. 중앙교회는 제일교회에서 갈라져 나온 교회이고 도림교회는 목포에서 건너온 교회다. 국립대학이 있다 보니 미래신자를 확보하기 위한 교회간 경쟁이 치열했다. 실질적으로 도림리에 5개의 교회가 있다. 2001년에 지어진 천주교 성당은 두 개의 공소를 안고 있다.
이러다보니 주민들 대부분이 신자이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 성당에 다니는 사람이 많아 일요일이면 집에 남아있는 사람이 오히려 이상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한 주민은 내가 교회에 나가는 이유가 천당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일요일에 혼자 남아있으면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게 본다면서 신앙보다는 체면 때문에 나간다는 이야기도 하고 있다.
안타까운 일도 있었다. 1980년대 일시에 많은 사람들이 주택을 짓다보니 건축자재가 모자라고 경험이 부족해 대부분이 부실주택이 되었다. 1990년대에는 복길간척지의 수문 고장으로 주민들이 염해 피해를 입어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개웅 옆의 연동은 일제강점기 때 골재채취장이었다. 이곳에서 나온 골재는 망운비행장 터 닦이에 사용되었다. 그런데 이 골재의 운반이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좋은 구경거리이기도 하였다. 즉 여러 대의 배에 골재를 싣고 한 척의 기선이 끌고 가는 모습이 신기하게 보였다는 것이다. 이 골재는 서해안 물길을 따라 망운의 비행장 공사장까지 운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