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포4리 송산 마을 - 소쿠리형의 아늑한 지형으로 순박한 주민들이 살고 있는 마을
- 작성일
- 2016.07.21 15:36
- 등록자
- 정OO
- 조회수
- 909
첨부파일(1)
-
이미지 송산.jpg
271 hit/ 285.7 KB
송산 마을은 학골 용골 청룡 새터 아랫골 윗골로 이루어졌다. 문헌으로 보면 1789년의 자료에는 나주목 삼향면 송산으로, 1912년과 1917년의 자료에도 삼향면 송산리로 나온다. 실지로 ‘송산’이란 지명보다 ‘솔뫼[松山]’라는 이름이 훨씬 더 정감이 가고 토속적인 느낌이 드는 이 마을은 행정구역상 삼향면 맥포리 4구에 속한다.
솔뫼의 죽은 사람들은 송장까지도 무거워
마을유래지에는 ‘국사봉 줄기에 위치한 마을로서 산세가 수려하고 송림이 울창하여 일명 솔밭[松田]으로 칭하였으나 근래에 와서 松山이라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조선시대부터 있었던 마을이름이다. 마을의 형성은 김해 김씨와 당진 최씨가 오래 전에 입향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하나 주민들은 300여년 전에 형성되었다고 믿고 있다. 자료나 입향조에 대한 기록이 없어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추정할 수는 있다. 이 마을의 구성원 중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진주강씨를 통해 입향연대를 산정해 볼 수 있다. 이 마을의 진주강씨 입향조는 강주억(숙종대. 자-연수)공으로 담양에서 이 마을로 들어온 것은 1700년대 초이다.
3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마을 앞에 아름드리의 당산나무가 있어 그곳에서 농악으로 길닦이를 하고 제를 지내 마을의 화합을 다지는 행사를 열었다고 하는 것이나 마을 입구에 깨어진 채 버려져 있는 牧使 송인옥의 선정비(영산강 치수와 관련된 송덕비)를 보면 마을의 역사가 있어 보이기도 한다. 선정비가 있는 곳은 예전에 한양 가던 길목이었다.
마을 앞 뻘논을 개간할 때 요즈음은 볼 수 없는 커다란 조개들이 무더기로 발견되기도 했다고 하니 아마 오래 전부터 이곳에 주민들이 살고 있었지 않는가 여겨진다. 그런데 이 펄(뻘)이 얼마나 기름졌던지 ‘솔뫼의 죽은 사람들은 송장까지도 무겁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주민들에게 경제적인 풍요를 가져다 주었다고 한다. 솔뫼골과 학골에 관련된 말이다.
예전에 마을 주변에는 ‘아름드리의 소나무가 많이 있었다’ 고 하지만 지금은 찾아볼 수가 없다. 현재는 서해안 고속도로와 호남선으로 둘러싸인 마을이 되었지만 이러한 철도나 길이 나지 않았을 때에는 전형적인 촌락 구조의 살기 좋은 마을이었을 것이라 짐작된다. 국사봉의 한 줄기에 자리 잡고 있는 마을의 풍수적 형세는 소쿠리 형으로 오른쪽에는 독배기의 잔등이, 왼쪽에는 불머리의 언덕이 마을을 감싸고 있고 앞 들에는 솔뫼뻘의 기름진 논이 있으며, 관음산의 부드러운 줄기가 외풍을 막아주는 아늑한 형세다.
마을의 왼쪽에는 학골[鶴谷]이 있다. 지금은 일로 驛舍가 들어서 버렸지만 주민들은 아직도 불머리(角頭 - 뿔머리)라 부르고 있으며, 국사봉의 맥을 잇는 줄기로 예전에는 이곳에 학들이 많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마을과 불머리 사이에는 물맞은 골이라는 계곡이 있다. 물만동이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커다란 폭포수가 있는 것이 아니라 계곡에 물길이 좋아 경사진 곳에 큰 대나무 대롱으로 물을 흘러내리게 해 그곳에서 물을 맞았던 곳이다. 상수원이 개발이 되기 전까지는 주민들이 그곳에서 물을 길러다 먹었기 때문에 이 마을의 주민들은 물을 맞아봐야 효능이 없고 외지인이 맞아야 효험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실지로 피부병이나 관절염에 시달린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물을 맞으면 상당한 효과를 보았다고 한다.
물맞은 골 위에는 절이 있었다. 현재는 없고 기와조각 등만 남아 있으나 4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주민들이 자주 드나들며 치성을 드렸던 곳이라 한다. 또한 물맞은 골 주변의 야산에는 차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어 녹차를 만드는 봄철에는 목포사람들이 많이 들어온다고 한다.
예전에는 이 골에서 내려오는 물이 내를 이루고 있어 큰 길에서 마을에 들어오려면 건너야 하는 징검다리가 있었다. 그 다리를 마을에서는 버버다리(法語 또는 梵語 다리)라고 했으며 현재는 시멘트로 포장이 되어 그 흔적만 희미하게 살필 수 있다. 이 물맞이 골은 1998년에 쓰레기장 건설 문제로 郡 당국과 크게 마찰을 빚었던 곳이다. 그러나 주민들의 일치된 힘으로 밀어붙이기식의 군의 폭거에 맞서 승리를 거두었던 역사를 갖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마을의 오른 쪽에는 이 마을에서 유일하게 볼 수 있는 고인돌이 있는 둔덕이 있다. 일명 ‘독배기’라는 곳인데 현재도 8기의 돌이 놓여 있다. 목포대학교 박물관의 조사에 의하면 13기의 지석묘가 있었다고 하나 더 찾을 수는 없었다. 고인돌 사이에 강화 노씨의 묘가 있었으나 현재는 묘는 이장해 갔고 망주석만 남아있다. 과거에는 이곳에서 건너 마을인 죽림 마을 사람들과 불 싸움을 하며 한해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고 친목을 나누었던 곳이다.
이 독배기에 돌이 놓여진 데는 중국과 관련된 전설이 어려 있다. 오랜 옛날 중국에서 만리장성을 쌓은다고 하니까 나라님은 전국에 있는 장사들에게 곳곳의 큰 돌을 중국에 가져가도록 하였다. 이 마을에서도 늦게서야 그 소식을 듣고는 이곳의 장사들이 주변에 있는 돌들을 모아 중국으로 가져가려고 잔등을 넘어서는데 이미 만리장성을 전부 쌓았다는 소식을 듣고 이 언덕에다 놔 버렸다고 한다. 지금은 독들이 여러 모습으로 놓여 있지만 당시에는 전부 중국이 있는 쪽을 향해 독들이 있었다고 한다. 독배기가 있는 줄기에는 목배이(먹바위. 묵방동)라 부르는 곳이 있는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오래된 한옥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없다.
근대사에서 주목할만한 인물이 있어
마을 앞에 있는 산은 ‘간임산’이라고 주민들은 부르고 있으나 의미를 모르고 있었다. 진주강씨 족보에는 官林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물맞이 골의 사찰, 마을입구의 법어다리 등 주변의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불교와 관련이 있는 ‘관음산(觀音山)’이 아닐까 여겨진다. 그래서 그런지 이 산에는 묘지가 많이 있다. 그 외에 지명으로는 달을 보는 곳이라는 ‘망월잔등’, 새터, 용골, 마을회관이 있는 자리인 청룡터, 장모퉁이 등의 이름이 남아 있다.
이 마을에는 우리나라 근대사에서 주목할만한 인물이 있었다. 광주학생운동에 참가한 채규호 공이다. 공은 1929년 11월 광주고보 5학년 학생으로 우리 학생과 일본인 학생이 나주역에서 충돌할 당시 앞장서 지휘하였던 분이다. 이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게 되니 이른바 광주학생관련 49인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공은 석방되어서도 김구 선생과 뜻을 함께 하며 독립운동을 한 요시찰 인물이었다. 광복이 되어서는 건국준비위원회 무안군 부위원장을 맡기도 하였으며 1950년에는 보도연맹 사건으로 안타까이 죽음을 맞이 한 분이다. 지금까지는 자료가 없어 알려지지 않았다가 이제야 주변의 도움을 얻어 독립유공자 신청을 하였다고 한다.
주민들은 서해안 고속도로 공사로 마을의 주맥을 이루고 있는 국사봉의 줄기가 뚫려질 때의 상황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었다. 산이 뚫리면서 채취된 파란 빛의 청돌(산돌)과 그 이후 마을 사람들이 뚜렷한 이유도 없이 7명이나 변을 당한 것을 예사롭지 않게 여기고 있는 것이다.
이 마을이 단합을 이루는 데는 주민들의 순박한 품성도 있었겠지만 ‘상포계’와 ‘솔뫼회’ 그리고 ‘청년회’ 등이 중심이 되어서 마을에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발 벗고 나서 도움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마을에 들어서는 들목에는 송산과선교가 호남고속철로 위에 개설되어 있으며 그 옆에 ‘효열부인남양홍씨의적비’가 서 있다.
* 출처 : 무안문화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