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현3리 원송현마을 - 조금나루가 있는 장수마을
- 작성일
- 2016.08.03 10:33
- 등록자
- 조OO
- 조회수
-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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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현(松峴)은 원송현 마을로 불려지기도 하는데 송현3리에 해당한다. ‘솔애기’ 또는 ‘송악’으로 불려지다가 현재의 이름인 송현으로 바뀌어졌다. 망운면 소재지에서 운남쪽으로 3㎞ 지점에서 오른쪽으로 우회전 하여 다시 2㎞ 정도 들어가면 나오는 마을이다. 송현은 송림이 많은 고개 밑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솔고개’ 또는 ‘솔재’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지금은 밭을 경작하기 위하여 소나무를 많이 없애버려 마을 뒤는 민둥 고개가 되었지만 군데군데 보이는 소나무는 과거에 울창했던 소나무 숲을 연상케 한다.
실지로 마을 앞 조금 나루에는 일제강점기까지 성인 두 사람이 팔을 벌려도 감쌀 수 없는 크기의 큰 소나무가 있었는데 그림자만 해도 200평이 넘는다는 나무였다. 그런데 일제 말에 일본인들에 의해서 강제로 송진 채취를 하게 되어 이 소나무도 그때 피해를 입어 사라지게 되었다. 당시 이 소나무를 일본인들이 자를 때 소나무가 피를 흘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소나무는 인근 바다에서 고기 잡는 어부들의 등대 역할을 하기도 하고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기도 하였으며 마을 이름을 ‘松峴’이라 하는 원인 제공을 하기도 하였다.
이 마을의 입향조로는 조선시대 중엽 김해 김씨의 김진관(1640 - 1703)이 인조반정 (1623년 西人 일파가 광해군 및 大北派를 몰아내고 능양군(綾陽君)을 왕으로 옹립한 사건)의 혼란함을 피해 1657년 충남 서천에서 이 마을로 이주해왔다. 조금 지나서 신창 맹씨의 맹윤창(1655-?. 자-지승)이 현재의 마을 뒤 뒷등 또는 도둑골이라 부르는 곳에 터를 잡았다가 도둑이 많아 살지 못하고 이 마을로 이주해 살았다. 해서 지금도 이 마을의 대표적인 성씨가 김해김씨와 신창맹씨이다.
마을 앞에는 조금나루라는 이름의 해수욕장이 있는데 예전의 명칭은 십리에 걸쳐 모래사장이 뻗어있다 해서 명사십리였다. ‘조금’은 潮水가 가장 낮은 때인 ‘음력 매달 초여드레와 스무사흘’을 이르는 말로 그 유래를 보면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마을에서 이 나루를 건너려면 물이 제일 많이 빠질 때인 조금에 가서야 건널 수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또 하나는 조금이 되면 물이 빠져 마을 앞 섬인 탄도와 선도를 건널 수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세 번째는 조금이 되면 칠산바다 등 인근 서해안에서 고기 잡는 배들이 이 나루로 들어와 어구를 손질한다든지 필요한 물품을 망운장에서 구입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조금나루는 이 지역 주민들에게는 건해풍을 막아주는 방파제였다. 해서 정월 보름이 되면 모든 주민들이 삽을 들고 나와 해모가지라 부르는 곳의 제방 보수공사를 하였다. 왜냐하면 방파제 밖의 물이 안쪽으로 넘어와 안쪽의 물과 합쳐지면 마을에 피해가 온다고 믿었기 때문에 주민들은 정성을 다해 울력에 참여하였다. 또한 이 나루가 학 성국이라 명당 자리가 있다고 알려지면서 선도 사람이 몰래 묘를 쓴 일이 있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沙頭穴에 해당되어 주민들이 정착하여 살 곳은 못된다고 한다.
이 나루는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백년초 선인장과 해당화가 많이 있었으며 드넓은 모래사장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유원지가 되면서 사람의 왕래가 잦아지자 민간요법에 선인장과 해당화가 좋다는 말이 퍼지면서 대부분 없어졌다. 또한 모래톱이 형성된 이유는 조류의 변화 때문에 일어난 일이기도 하지만 또 하나는 마을 뒤 구랫골의 납싹(납짝)바위의 영향으로 조류에 변화를 주어 생긴 일이다. 사실 이 나루에 둑이 생기고 인위적인 시설물이 들어서면서 모습이 달라지고 있는데 한쪽에선 이미 모래의 유실이 가속화되어 뻘과 자갈들이 드러나고 있다.
외지인에게 넘아 가
원래 이곳에는 사람이 살지 않았다. 선도나 지도 사람들이 이 나루터를 이용할 때도 흔한 주막 하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4가구나 거주하면서 영업행위를 하고 있다. 마을 주민 중 일부가 나루터에서 장사를 하면서 수익금의 일부를 마을 발전기금에 보탠다는 합의하에서였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아직까지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고 한다.
몇 년 전에 기업도시 열풍이 불어닥친 일이 있었다. 그때 마을 공동의 재산이었던 이 나루가 외지인에게 팔렸다. 그런 이유로 현재 나루터 발전의 시급함이 요구되는데도 계획을 세우지 못하고 있다. 또한 질 좋은 백사장을 갖고 있으면서도 여름철 해수욕장 개설을 하지 못하고 있어 주민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예전에는 물이 빠지면 마을 앞 바다에는 거대한 모래 운동장이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이곳에서 축구와 씨름을 하기도 하고 아이들은 달리기 등 놀이터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새마을 사업이 시작되면서 이 마을 뿐 아니라 인근 마을에서 바닷모래를 건축자재로 이용하게 되어 모래가 점차 사라지면서 이제는 뻘밭이 되었다.
이 마을의 특징으로는 장수노인이 많다는 것이다. 90세 이상이 3명이고 80세 이상이 20여명이나 되며 79세 이상을 말한다면 30여명이 넘는 노인들이 아직도 뻘밭에서 낙지를 잡는다거나 농사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장수할 수 있는 요인으로 마을 사람들은 기름진 땅과 맑은 물 그리고 건강한 해풍과 마을 앞 뻘에서 생산하는 해산물을 이유로 꼽았다. 이 마을에서 잡히는 낙지, 숭어, 석화 등은 맛이 좋기로 무안에서 제일이며 전국에서도 그 맛이 빠지지 않는다고 한다. 게르마늄 성분이 풍부한 황토가 비가 오면 씻겨 내려가 뻘과 만나서 형성된 천연의 조건이 맛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또 하나 마을에서 자랑하는 것이 있다. 이 마을에는 8개의 성씨가 살고 있는데 서로 싸우거나 척을 진 일이 없어 화목하게 지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늘 마을엔 훈기가 있고 여유가 있으며 즐거움이 넘친다고 자랑한다.
마을 뒤 진작몰 또는 솔마루라 부르는 곳에는 당산제를 모시는 단이 있다. 이 당산제는 입향조가 마을에 정착할 때 심었던 팽나무가 神木이 되어 그 나무 아래서 지낸다. 원래는 정월 초사흘에 지냈는데 현재는 정월 보름에 지낸다. 제를 지낼 때는 제관을 뽑는데 뽑힌 제관은 궂은일을 보아서도 안 되며 비린 것을 먹어서도 안 된다고 한다. 이렇게 정성을 드림으로서 마을에는 평화가 오고 전염병이 들지 않으며 풍년이 온다고 주민들은 굳게 믿고 있다. 또한 이 마을에는 마을 농악대가 있어서 전국대회에 마을 단일팀으로 출전까지 하였으나 현재는 젊은이들이 없어 그 맥이 끊어짐을 아쉬워하고 있다.
마을 뒤에 교회가 있었으나 현재는 성동의 문래등으로 옮겨갔다. 마을 첫들머리에 신창맹씨 세장비가 있다. 1996년에 세운비로 맹씨의 유래와 이 마을 입향조 맹윤창 공의 사적을 기술하였다. 옆에는 1969년에 세운 ‘학송맹공실행비’가 있다. 조금 지나면 김해김씨 입향조인 ‘통훈대부김진관유허비’가 1986년에 세워졌다. 이어 1945년에 세워진 효자각이 있다. 효자각 안에는 ‘임하김효자비’라는 비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