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서4리 톱머리마을 - 단감이 유명한 해수욕장의 마을
- 작성일
- 2016.08.02 16:57
- 등록자
- 조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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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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톱머리는 피서4리에 속하는 마을로 원래는 용호동과 같은 행정구역이었다. 용호동이 무안공항 부지로 편입되면서 2000년대에 분리되어 나온 마을이다. 이곳은 톱머리 해수욕장으로 널리 알려졌다. 해안은 간만의 차가 커 간조 때 펼쳐지는 끝없이 넓은 백사장과 보호림으로 지정된 울창한 해송 숲이 조화를 이루어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고 있다. 또한 창포만 간척으로 인한 거대한 호수가 형성되어 있기도 하다.
톱머리라는 지명의 유래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유당농원 쪽에서 공항로를 따라 오다가 보면 톱머리 해수욕장과 무안국제공항으로 가는 삼거리가 있다. 그곳에서 해수욕장으로 들어오는 언덕을 넘어 오른쪽에 바위산이 있었는데 이곳에 길이 나기 전에 이 바위의 모습은 동물의 모습이었다고 한다. 주민들이 ‘코뺑이’라고 부르는 이 바위가 거북이 머리라고 보기도 하고 토끼머리라고 보기도 하는데 많은 사람들은 토끼머리라고 했다. 탱크의 모습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이런 의미에서 톱머리는 토(兎)머리에서 비롯된 음운변화의 결과로 보기도 한다.
다른 하나는 1917년 일제강점기 때 펴낸 조선면리동일람에서 망운면 桃茂리라는 지명이 나온다. 의미로 본다면 복숭아 나무가 무성히 자라고 있는 마을이라는 말인데 추측컨대 당시 과수농장에서 비롯된 지명이 아닌가 여겨진다. 이후의 자료에는 桃茂리라는 지명은 나오지 않고 2,000년대에 와서야 독립된 마을로 표기되었다.
일제강점기 때 톱머리 일대는 일본인 중기의 소유였다. 공항 앞 낙지 직판장에서 코뺑이라고 부르는 지역까지 약 16정의 토지를 소유했던 중기는 이곳에다 여러 가지 과일을 심었다. 단감을 비롯하여 복숭아 비파 등을 대규모로 심어 많은 소득을 올렸다. 중기는 현재 비치호텔 자리 전에는 송죽식당 자리에다 커다란 집을 지어놓고 과수단지를 운영했던 것이다. 이때 복숭아 단지가 많아 1917년의 자료에 桃茂리라는 지명이 나오지 않았을까 여겨진다.
창포를 둘러싸고 있는 지명 중에 동물과 관련된 5머리가 전해져 오고 있다. 여기서 ‘머리’라 함은 바다를 향해서 육지의 맥을 타고 달려오는 반도 형국의 지형을 말한다. 닭머리[鷄頭 - 동산리의 당두], 갈머리[鶴頭 - 학이 목이 말라 목을 추기는 형국, 양학리의 병곡 마을이다], 새머리-쇠머리 [牛頭- 소의 머리 형국을 하고 있다. 서호리 유당농원 입구의 산], 톱머리 - 토머리[兎頭, 土頭 - 토끼의 머리 형국이라고 하는 분도 있고, 지네 머리 형국이라고 하는 분도 있다. 토충(土蟲)은 지네를 가리킨다]. 마지막으로 망운면 피서리를 피머리라고도 하는데 피머리가 어떤 동물을 상징하는지 많은 어른들을 찾아 물어 보아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이처럼 톱머리는 토끼머리에서 연유된 지명이다.
이 마을에 처음 들어온 사람은 진주강씨 강효복이다. 그는 망운면 조산마을에서 살았으나 한국전쟁 이후 이곳으로 들어와 터를 닦고 마을을 형성하였다. 그 이전에는 일본인들이 재배하다 남기고 간 과수원이 있었을 뿐이다.
마을 전체가 전형적인 반도형이었다. 지금은 간척사업으로 둑이 연결되어 반도의 특성을 잃어버렸지만 원래는 마을 앞뒤로 모래톱이 쌓여 해수욕장으로서는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현재는 톱머리 앞에만 해수욕장이 형성되었지만 예전에는 뒤에가 더 유명한 왕모래 사장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았던 곳이다. 특히 잔등이라 부르는 곳에는 아름드리의 해송이 많이 있어 인근학교에서 소풍 장소로 즐겨 찾는 곳이기도 하였다. 또한 상쾡이와 민물장어가 많이 있어 경상도 하동에서 장어를 잡으러 오기도 하였다. 하지만 1960년대부터 막기 시작한 창포만이 1983년도에 완전히 막힘으로써 원래의 모습을 잃어버렸다.
톱머리의 대안 단감은 국내 최초의 육성 품종이다
이 마을은 일제강점기부터 개발이 되었다. 그 이전에는 뚜렷한 흔적들이나 특징이 없는 일반적인 지역이었으나 일본인 중기가 들어오면서 해양성 기후를 살려 앵두 살구 복숭아 단감 등을 재배하는 과수원을 조성한 것이다. 특히 이곳의 단감은 “톱머리 단감”, “오베니”, “극대형 부유” 또는 “대흥사”라 불리며 1988년 원예연구소에서 선발되어 “대안단감”으로 명명된 우리나라 최초의 국내 육성 품종이다.
이 단감은 세력이 약하여 가지가 옆으로 심하게 퍼지고 밑으로 처지는 성질이 있어 나무가 크게 자라지는 않는다. 과실 크기는 일반 단감보다 크며 형태는 편원형으로 부유 품종과 거의 비슷하나 과실 배꼽 부위에 4개의 엷은 골이 있고 꼭지접합부가 부유보다 움푹 들어간 것이 특징이다. 육질이 연하며 과즙이 많고 맛이 담백한 완전단감이다. 또한 저장성이 약하고 수확 무렵의 후기 낙과가 생기기 쉬운 단점이 있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이곳에 단감을 재배하면서 그들의 재배 기술을 감추기 위해 한국인들을 의심했던 일은 두고두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즉 이곳의 단감이 너무 맛있어 한국사람들이 감을 훔쳐가거나 기술을 몰래 배울까봐 일꾼들을 의심하고 단속하였다는 것이다.
이 마을의 자랑인 톱머리 해수욕장은 간만의 차가 심하여 간조 때 펼쳐지는 끝없이 넓은 백사장과, 보호림으로 지정된 울창한 해송 숲이 조화를 이루어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한다. 해수욕장의 긴 백사장을 따라 횟집과 숙박업소들이 자리 잡고 있어 해수욕과 함께 편히 쉴 수 있으며 싱싱한 생선회도 즐길 수 있다. 백사장 길이는 2km, 폭 100m 정도이다.
교통편도 편리한 편으로 가족 단위 피서객이 많이 찾으며, 호젓하면서도 빼어난 경관과 인근 해안에는 감태 뿐 아니라 돔, 숭어 등 어족이 풍부하여 낚시 겸 피서를 즐기려는 사람들이 즐겨 찾는다. 현재는 팬션을 비롯한 숙박업 횟집 등 음식업이 들어와 관광단지가 조성되었다. 특히 무안공항의 활성화로 중국인 관광객이 증가하면서 국제적인 관문으로서 역할도 하고 있다. 하지만 원주민들이 우려하는 것처럼 갈수록 예전의 정다웠던 마을 인심은 없어지고 차디찬 도시 인심이 되어 가는 각박한 세태를 아쉬워하고 있다.
남아있는 지명으로 공항로의 낙지 직판장 자리를 문간(일본인 중기의 집이 시작된다는 의미)이라 하고 톱팬션 앞 바다를 감틀이라 한다. 감틀이라 부르는 이유는 감태가 많이 생산되었던 곳이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
1945년 광복을 맞아 일본인들이 후퇴하면서 톱머리 앞바다 혹은 목포 소지도 부근에 수많은 무기와 재물을 버리고 떠났다는 소문이 있으나 확인이 되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