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신기2리 환학동 마을
- 작성일
- 2016.08.22 15:28
- 등록자
- 홍OO
- 조회수
- 819
첨부파일(3)
-
이미지 상신리 환학동1.JPG
394 hit/ 4.17 MB
-
이미지 환학동2.JPG
326 hit/ 3.84 MB
-
이미지 환학동3.JPG
311 hit/ 3.39 MB
문맹자가 한 사람도 없는 학을 부르는 마을 - 상신기2리 환학동 마을
환확동은 상신2리에 속하는 마을로 산골 우데미 아래데미 송촌 서당뫼 등으로 이루어졌다. 마을 뒷산이 학 형국의 산이어서 마을 이름도 그와 관련지어 지은 것이다. 지명유래를 보면 북쪽에서 남쪽을 향해 날아오던 암수 두 마리의 학이 이 마을을 지나면서 풍광이 수려해 수컷 학은 이곳에 주저앉고 암컷 학은 건너 마을 산정리의 학두리에 머물며 살았다. 두 마리의 학은 서로를 바라보며 오가면서 행복하게 살았는데 이 마을의 학이 마치 학두리의 학을 부르는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어서 ‘학을 부르는 마을’이란 뜻의 환학동이라 하였다.
참고로 산 너머에는 鶴田洞이 있다. 행정구역상으로 몽탄면 당호리에 속한 鶴田洞은 학이 알을 품고 있는 소쿠리 모양의 형국이다. 뒷산은 학머리와 날개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마을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그 안에 있는 집들이 마치 학의 알 형태를 취하고 있다
마을유래지에는 ‘옛날 학이 마을 뒷산에 살고 있었는데 어느날 새끼의 먹이를 구하러 나갔던 학이 돌아오지 아니하여 학이 다시 돌아오라고 불렀던 곳이라 하여 喚鶴洞이라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마을에는 원래 경주김씨가 살았는데 전염병으로 환란을 당한 뒤 이천서씨가 들어왔다. 이천서씨 입향조 서수선(자-선여, 1750-1810)이 이로면에서 살기 좋은 이 마을로 이주하여 정착하면서 마을을 형성한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남평문씨인 문택연(자-인황, 1791-?)도 이 마을로 들어왔다.
문헌을 통해서 지명의 변화를 살펴보면 1789년의 자료인 호구총수에 무안현 노촌면 환학동으로 나온다. 1912년의 자료에도 일로면 환학동으로 1917년엔 일로면 상신기리 환학동으로 기록되다 이후엔 계속 같은 이름으로 나온다.
이 마을은 일로의 모스크바로 불릴 정도로 전향적인 사상을 갖고 있었다. 해서 한국전쟁 때 이 마을은 많은 피해를 입었다. 특히 1950년 9월 좌익의 사상교육을 거부한 5명의 주민들이 일로의 다른 곳에서 붙잡힌 사람들과 같이 목포 시아바다라 불리는 곳에서 익사하거나 사살되기도 했으며 전쟁 중 스스로 월북한 사람도 있었다. 인민군이 물러간 후에는 국군에 의해서 또 많은 사람이 죽기도 하였다.
일제강점기 때는 이 마을이 다른 마을에 비해 앞서갔다. 이 마을에서 두 명의 면장을 배출할 정도로 인물이 많았으며 면에서는 제일 먼저 전기가 들어오는 등 발전의 속도가 빨랐다. 또한 이 시기에 잠업(蠶業)을 장려해 마을 일대가 뽕나무 밭이었다.
진흥골이라 부르는 곳에 천주교 공소가 있다. 이 공소는 1880년 함평 보아촌에서 서용호와 그의 부인이 이주 해와 자택에서 주일 예배를 보는 것으로 시작했다. 1899년 방인사제로는 6번째인 이내수 신부가 몽탄 우적동에 거주하면서 전교활동을 했다. 1913년 일로읍 상신기리 12번지에 건평 25평의 성당 건물을 신축해 목포 산정동에 편입되었다. 한국전쟁 후 신자수가 급증해 현 부지를 매입하고 성당을 건축했다. 1954년 일로본당에서 사제가 파견되어 일로성당 관할 공소로 편입되었으며 교구에서는 4번째로 오래된 곳이다. 일로 본당보다 역사가 오래되었을 뿐 아니라 일제강점기 때 들어섰으며 처음엔 초가집에서 시작했지만 이제는 번듯하게 독립된 건물을 갖고 신자를 맞고 있다. 일제강점기 때 성당 밑에는 연자방아가 있었고 베틀공장이 있었다.
마을의 전주민이 신자로 문맹자가 한사람도 없어
진흥골은 일제강점기 때 진흥학교가 있던 자리로 교육의 터여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진흥학교는 나중에 농장 마을로 갔다가 광암으로 들어가 현재의 일로 초등학교가 되었다.
우데미에서는 주변 곳곳에서 오래 된 토기와가 많이 나온다. 특히 방죽 위의 대밭에서는 청기와를 포함한 아름드리의 주춧돌도 나왔다고 하니 마을의 역사를 말해주는 흔적으로 보인다. 또한 두 아름이 훨씬 넘는 커다란 당산나무가 있었으나 나무가 귀할 때 주민 중 한사람이 베어서 사용해 지금은 없다. 마을 입구에 한 기의 고인돌이 있다. 원래는 주변에 4기가 있었다고 하나 밭을 경작하면서 2기는 파괴해 버리고 1기는 묘지를 만들면서 묻혀졌다.
마을에 닭 오리 돼지 소 등 가축을 기르지 않고 있다. 대신 하우스 등 육묘사업이 활잘하다. 해서 이 마을의 주 소득원은 고추육묘와 쪽파다. 특히 고추 육묘는 도서지방을 비롯한 전국에 공급될 정도로 품질을 인정받았다. 현재는 시금치와 양파도 재배 면적을 점점 넓혀가고 있다.
한때 이 마을에는 문맹자가 없었다. 우리군의 70대 이상 노인들의 문맹률이 30%가 넘는 현실에 이 마을에는 한 사람도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천주교가 들어서면서 선교 작업의 일환으로 한글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마을 주민 대부분이 천주교 신자다. 마을에 기도원이 있지만 한 가구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천주교 신자로 생활하고 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주민들의 표정이 편하고 넉넉해 보인다.
이 마을에는 두 개의 샘이 있다. 우데미샘과 산골샘이 있는데 우데미 샘에는 ‘전’이 있었다고 한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전’은 좋은 샘에 나타나는 일종의 뱀과 같은 물체인데 귀한 약초로 알려지기도 한다. 좋은 샘이기 때문에 인근 마을에서 정월 보름만 되면 물을 가지러 오는 사람과 물을 지키는 사람이 서로 대치해 장관이었다. 이른바 물타러 간다는 놀이가 진행되었던 것이다.
비선재가 있으며 당호리로 넘어가는 고개에 가장골재라 부르는 지명이 남아있다. 중촌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흙벽이 있는데. 이곳에 초새가 많이 살고 있어 초새골이라 부른다. 마을 앞에 서종식기공비가 있으며 마을 뒤에는 1999년에 세운 시멘트 벽돌로 이루어진 경주김씨 재각이 있다.
마을에 상수도 공사가 진행 중이다. 이 마을에는 저수지가 없어 마을 앞에 펼쳐진 간척지들도 비가 오지 않으면 경작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하수 개발이 이루어진 지금은 일로읍의 어느 지역보다도 물이 잘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