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정3리 도덕지마을
- 작성일
- 2016.08.22 14:52
- 등록자
- 홍OO
-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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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을 베푸는 마을 - 산정3리 도덕지 마을
도덕지는 산정3리에 속한 마을로 주변 사람들에게 덕을 베푸는 마을이라는 유래를 지니고 있다. 원래 이 마을은 농지는 없고, 있다 해도 물이 없어 경작을 할 수 없는 천수답만 있었던 빈촌이었다. 일제강점기인 1925년에 영화농장이 조성되면서 비로소 여유가 생겼지만 가난해도 주변에서 도움을 청하면 모른 채 하지 않고 기꺼이 나눠져 도덕마을이라 불렸던 것이다.
마을유래지나 마을 앞의 안내판에도 마을유래를 ‘마을 앞의 논이 밥상 모양과 같이 생겨 마을 주민들은 밥 걱정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마을이 길가에 위치하고 있어 지나가는 길손에게 덕을 많이 베푸는 마을이어서 도덕 마을이라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가난했지만 인정을 나누는 마을이었던 것이다.
주민들은 마을 이름을 도덕지가 아닌 도덕 마을로 불러야 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행정 착오로 사용했던 지명이 주민들의 의사와는 다르게 불리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정부가 새마을 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하면서 식량 증산의 일환으로 다수확 품종인 통일벼를 개발하여 전국에 보급한 적이 있었다. 일로읍에서도 이 정책에 호응하여 처음으로 통일벼 재배 단지를 이 마을에 조성하였다. 그때 이 단지를 부르는 말이 도덕 마을에 있다 해서 도덕단지(道德團地)라 했다. 그렇게 불렀던 단지 이름이 정리가 되지 않고 마을 이름으로 변해 지금까지 내려온 것이다.
이 마을의 입향조는 밀양박씨 박용정(호-약헌, 1887-1949)이다. 공은 이웃 마을인 복룡촌 마을에서 1940년대 이 마을로 내려와 정착하였다. 당시 이 마을은 점등을 중심으로 형성된 신흥마을이었다. 1920년대 영화농장이 조성되면서 전국 각지의 사람들이 몰려 와 정착하며 이루어진 마을이기 때문이다. 이 마을이 들어 선 자리도 간척으로 농장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강 가였다.
문헌으로 살펴 본 이 마을의 역사도 짧다. 조선시대 1789년의 자료인 호구총수나 일제강점기인 1912년 1917년의 자료에는 마을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1987년의 자료에 비로소 일로읍 산정리 도덕지 마을로 나온다.
점등과 도덕으로 이루어진 이 마을은 도덕리의 와전된 발음인 도동기라고도 불렸으며 20여 년 전에 신언목 마을에서 분리되었다. 행정구역상으로 분리되면서 두 마을간 다툼이 약간 있기도 하였다. 신언목 마을은 역사가 있는 마을인 반면 이 마을은 신흥 마을이었는데 두 마을간 행정구역 조정이 안 되었기 때문이다.
이 마을은 4년 전에 우리 지역에서 처음으로 마을기업을 유치했다. 마을기업이란 지역공동체에 산재한 향토 · 문화 · 자연자원 등 각종 특화자원을 활용해 주민 주도의 비즈니스를 통해 안정적 소득과 일자리를 창출하는 새로운 형태의 기업을 말한다. 즉 마을 주민이 주도적으로 지역의 각종 자원을 활용해 안정적 소득 및 일자리를 창출하는 마을단위의 기업을 말하는 것이다. 주민들은 이 기업을 통해 볏짚 공예를 하는데 가마니를 비롯한 토사유출방지거적, 인삼밭보호거적 그리고 나무보온재 등을 생산하고 있다.
매월 반상회를 개최하고 있어
해서 이 마을은 농한기가 없으며 초겨울 마을 앞 풍경도 다른 마을과는 사뭇 다르다. 보통의 마을은 벼를 수확하고 남은 짚은 사료용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속칭 공룡알을 만들어 보관하고 있는데 이 마을 앞의 농장은 이런 공룡알들이 없다. 모두 짚공예로 활용하기위해 거두어 들였기 때문이다. 또한 농장 곳곳에 해충방재기가 있다. 유기농단지이기 때문이다. 오래 전부터 이 마을 주민들은 전량 계약재배를 통해 유기농 농사를 짓고 있다. 하지만 초기에 의욕적으로 실시했던 마을 기업이 판로의 부족과 일손의 노령화로 쇠퇴의 길을 걷고 있다.
이 마을은 드물게도 매월 반상회를 개최하고 있다. 매월 25일이면 주민들이 모여 마을의 대소사를 협의하고 결정한다. 또한 반상회 날에 노인들의 생일잔치를 주민들 공동으로 지내고 있다. 해서 여러 성씨가 사는 복합 성씨의 마을이지만 화합과 협력이 잘 되어 주민의 목소리가 마을 밖을 벗어난 적이 없다.
주민들은 마을 옆 회산방죽에서 개최되는 무안군의 대표적 축제인 연꽃축제에 대해서 불만이 많다. 많은 관광객들의 통행으로 위험하고 번거롭기만 하지 주민들에게는 실질적인 소득이 없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주민 몇 사람이 축제 기간 동안 노점상을 벌여 농산물 판매 등으로 얻는 소득이 대부분이다. 주민들은 ‘최소한 축제가 개최되는 기간 동안 방죽 옆의 마을들을 제도적으로 참여케 해서 소득에 따른 실질적인 이득과 축제 개최지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게 해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풍족하지는 않지만 주변을 생각하는 넉넉한 마음과 주민들의 협조는 주변 마을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한국전쟁 때 이 마을은 피해가 없었다. 당시 이 마을에는 공산당 일로면 위원장이 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민들은 좌우 어느 쪽에서도 피해를 입지 않았으며 오히려 이 사람 때문에 목숨을 건진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남아있는 지명으로 마을 뒤 옛골(욋골로 불리기도 함. 예전엔 초분골이었음)과 그 맞은편에 옹기를 구웠던 점등이란 지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