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호3리 우비마을
- 작성일
- 2016.08.22 13:59
- 등록자
- 홍OO
-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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淸湖里
淸湖里는 일로읍 소재지에서 남쪽으로 약 7㎞ 가량 떨어져 있으며 지역의 주변에 물이 맑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영산강 하류에 위치하고 있으며 강 건너에는 영암군 학산면과 서호면을 마주하고 있다. 서해안고속도로에서 남해안고속도로로 연결되는 국도2호선 대체우회도로가 무영대교로 연결되고 있다.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기 전까지는 청호 또는 청호동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주룡동, 용연동, 용동, 서룡정, 망해동, 비로촌 일부를 병합하여 지금의 이름인 청호리로 고쳐 무안군에 편입되었다. 현재는 주룡, 청호, 우비 등 세 개의 마을로 이루어졌다. 주룡마을의 소포사와 경모재 그리고 충신정려각, 청호마을의 남평문씨 재각과 청망분교 그리고 청호교회가 있다. 우비마을에는 상사바위와 생기미 나루가 있다.
상사바위의 전설을 안고 있는 소코 마을 - 일로읍 청호3리 우비(牛鼻) 마을
우비는 용골, 각골, 생기미, 우비, 대밭골을 포함하는 마을로 청호3리에 해당하며 ‘소코 마을’로 불리기도 한다. 마을을 에워싼 지형이 소의 코와 흡사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이곳에 집터를 잘 잡으면 부자가 된다는 속설이 있다. 이 마을의 이름은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나오나 1912년의 지방행정지명일람이나 1914년을 거쳐 1917년에 작성된 朝鮮面里洞일람에는 우비라는 마을명은 나오지 않고 용동으로 나온다.
생기미[生金] 주변의 대밭골에 정착
마을유래지에는 ‘나주 정씨 정용옥이 나주에서 1626년경에 이곳에 이주하여 정착해 어업을 주로 하였으며 그 후 차츰 황씨 김씨 등이 이주해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주민들은 오래 전에 황씨들이 생기미[生金] 주변의 대밭골이라는 곳에서 80여 호가 넘게 정착하여 살았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대밭골 남자들이 서해바다로 고기 잡으러 갔다가 풍랑을 만나 대부분이 죽고 난 후에는 남아있는 가족들도 뿔뿔히 흩어져 현재는 황씨들이 한 가구도 살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나서 들어온 사람들이 나주 정씨를 비롯하여 여러 성씨의 사람들이 이주해왔다고 한다.
지도를 놓고 보면 우비 마을은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적 지세다. 영산강가에 있는 대부분의 마을들은 뻘이 있어서 직접 영산강과 접해 있지는 않는데 이 마을은 바로 영산강과 접해 있다. 해서 영산강이 막히기 전까지는 농지가 없어 대부분이 어업을 주생활로 하며 가난하게 살았다. 이후 1980년대에 영산강이 막히면서 많은 농토가 형성되어 나름대로 부를 형성하여 살고 있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우비 마을을 포함한 주룡 마을 아래의 경작할 수 있는 땅들은 대부분 나주 정씨와 연안차씨 소유였다고 한다. 나주정씨는 주룡마을 입향조인 소포 나덕명의 수행원이었다. 소포공이 나주 정씨의 성실함과 열성에 고마워 주룡 마을 아래의 토지들을 정씨에게 물려준 데서 비롯된다.
그런데 연안차씨 소유의 땅이 많은 것은 일제강점기 이후부터다. 일제말 일본인 회사의 서사로 일하던 차남진씨의 아버지는 광복이 되면서 일본인들이 허겁지겁 일본으로 돌아갈 때 그들이 소유하고 있던 토지를 자신의 명의로 돌려놓았다. 해서 청호리 일대만이 아니라 무안 곳곳에 차씨 소유의 땅이 많게 된 것이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이러한 토지 소유에 대한 재판이 많이 벌어져 상당부분 원소유자들이 차씨로부터 땅을 되찾았다고 한다.
청호리에는 두 개의 나루터가 있다. 주룡나루와 생기미[生金]나루가 그것인데 이곳은 영암과 연결되는 길목이며 영산포로 오고가는 각종 배들의 중간 기착지였다. 주룡나루는 역사적 의미를 갖는 나루이지만 생기미 나루는 온갖 배들이 드나들던 황금나루였다. 특히 이 나루는 영산강 뱃길에서 썰물과 밀물이 마주치는 중간지점에 해당되어 수송배나 고깃배들은 대부분 이 나루에서 일박을 한 다음 물때를 보아 오고갔던 것이다. 장날에는 영암 독천장에서 소를 사서 이 나루를 건너 일로장에 팔면 많은 이문을 남길 수 있었다고도 한다. 해서 이 나루는 돈이 모여들었고 사람들이 찾아왔다. 이렇게 생기미가 흥했던 것은 주민들의 말처럼 ‘생기미라는 말 자체가 돈을 뜻하는 것이어서 이곳에 들어가면 돈을 벌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풍수적으로도 이 나루는 소코에 해당된다.
생기미 나루에는 샘이 있는데 특이한 구조이다. 샘 위에는 가옥이 들어서 있으며 물은 방 구들 아래에 있는 바위 틈에서 난다. 예전에 이 물은 먼 바다로 고기잡이 하러 나가는 어부들에겐 굉장히 중요한 샘이었다. 왜냐하면 다른 물은 가져가면 뜨거운 햇볕 아래서 3일을 넘기기 어려운데 이 샘물은 보름이 지나도 물맛이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도 생기미 물은 통에 받아 놓은 지 두 달이 넘어도 이끼가 끼지 않는다고 한다.
생기미라는 이름은 한자 ‘生金’에서 변화된 지명으로 볼 수도 있으나 어학적으로는 해안선이 오목하게 들어간 곳의 지명을 지칭하기도 한다. 이 생기미 샘 위는 영산강이 막히기 전까지는 주막이 자리하고 있었으나 이어 기도하는 사람이 기도처로 사용하고 있다가 현재는 일반인이 거주하고 있다. (참고로 영산강 건너 마주 보이는 영암군 학산면에도 생기미 나루가 있다)
이러한 지리적 여건 때문인지는 몰라도 우비 마을 주변에는 장골 또는 장재라 부르는 지명이 남아있다. 현재 죽산 분교와 주룡 저수지 주변으로 절골 밑 지역을 말하는데 예전에 장시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학자들 사이에는 우리나라 장시의 출발을 나주와 무안으로 보고 있다. 그중에서도 영산강 주변 특히 일로에서 찾고 있는데 ‘장골’ ‘장재’라는 지명으로 인하여 이 지역이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형성된 장시가 아닌가 여겨진다.
승화된 사랑 - 상사바위 전설
이 마을에는 남녀간의 승화된 사랑이 얽혀있는 상사바위 전설이 있다. 상사바위는 마을 옆 영산강변에 있는 바위이다. 우리나라 전역에서 마주 보고 있는 바위가 있으면 대체로 형성된 설화가 이루지 못하는 남녀간의 비극적인 사랑을 소재로 한 상사바위 전설이다. 그런데 우비 마을의 황씨 처녀와 각골 마을의 추씨 총각이 엮어가는 이 마을의 상사바위 전설은 사랑이 비극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승리하는 사랑이다. 이는 다른 지역의 전설과는 다른 발전된 형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없는 자의 설움을 각설이 타령으로 승화시킨 품바와 함께 일로만이 갖는 소중한 문화적 자산이기도 하다.
이 바위는 어업을 주로 하고 있는 주민들에게는 중요한 터이기도 했다. 영산강의 지리적인 여건이 상사바위가 있는 이곳을 지나면 바로 큰 바다로 나가는 길목이기 때문이다. 해서 예전에는 이곳에 서해바다로 어업을 나가는 어민들의 무사귀환과 풍어를 기원하는 사당이 있었으며 생기미 나루에서 식량과 식수를 가득 실은 배들이 큰 바다로 나가기 전 다시 한번 되돌아보고 가는 바위이기도 하다.
각골 위에 있는 상사바위 벽에 김삿갓 김병연의 시가 음각되어 있다는 구전을 듣고 배를 빌려 상사바위 주변을 살펴보았으나 음각된 글씨는 찾지 못했다. 예전에는 이 상사바위 정상이 지역 주민들의 사랑을 받았던 쉼터였다. 풍광이 좋아서 시인묵객들이 즐겨 찾았던 명소이기도 하였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떨어진 바위라고 부르는 곳에 바둑판이 그려진 큰 돌이 있었는데 50여년 전에 주변 마을 주민이 힘자랑을 하다 영산강 빠뜨렸다고 한다. 바둑판은 주룡마을 입향조 나덕명과 영암으로 귀양왔던 홍의장군 곽재우가 바둑을 둘 때 사용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요즘 들어서는 아이들의 소풍지는 물론 농사가 끝나고 주민들이 마을 행사를 할 때도 찾아와 즐기는 곳이다.
한국전쟁 때는 주민들이 상사바위 위에다 수숫대로 초소를 만들어 만약을 대비했다. 당시 영암에는 좌익들이 많아 저녁이면 영산강을 건너와 마을의 식량을 털어가곤 했다. 그때 주민들이 상사바위 이 초소에서 망을 보고 있다가 좌익들이 넘어오면 싸이렌을 울려 주민들을 피난가게 하였던 것이다.
이 마을 주민들의 단합심은 다른 마을이 부러워할 정도이다. 한 집에서 궂은 일을 당하면 주민 모두가 나서서 내일처럼 거들었다고 한다. 지금도 그러한 풍경은 변화가 없다고 한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느냐고 묻자 한 주민은 가난해서 그런다고 한다. 가난했기 때문에 배고픔을 줄이기 위해서 모두 모여 함께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또한 여러 성씨들이 모여 살다보니까 자기주장 대신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먼생기미와 싸짓끝이라 부르는 밀물곶이 지명과 마을 입구에 있는 산을 봉두막이라 부르는 지명이 있다.